[소설]아라리 난장 1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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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자취방으로 가보았으나 한철규는 윤씨와 태호를 동반하여 삼척장으로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채낚기 어선을 타기 전에 이번 파수에는 세 사람이 짝이 되어 떠나도록 대충 합의를 보았던 일이지만, 막상 텅 빈 방으로 들어서자니 코빼기부터 썰렁하고 스산하기 그지 없었다.

벌써 이틀째나 바로 코밑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빈둥거리고 있는 봉환의 속내를 눈치 빠른 승희가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든 내막이 백일하에 들통이 나버렸다 하더라도 섣불리 집으로 고개를 디밀 수는 없었다.

북평댁이 식당에 버티고 있는 한 승희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녀와 남남으로 등을 돌리는 엄청난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 또한 북평댁을 식당에서 몰아낸 뒤에 따져볼 일이었다. 그는 선반 위의 베개를 내려 뒷덜미를 고이고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사이에 봉환이 몫의 노임까지 계산해서 받아쥔 변씨는 시치미를 뚝 잡아뗀 얼굴로 영동식당으로 들어섰다. 벌써 정오를 넘긴 시각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승희가 후딱 문을 열었다.

그녀의 등 너머로 바라보이는 방안의 풍경은 역시 말짱하게 정돈은 되어 있었지만, 두 여자가 함께 기거하고 있다는 흔적은 뚜렷했다. 신발을 끌고 술청으로 나서는 승희의 표정에선 아무런 동요도 갈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일발이 채낚기 어선을 타고 돌아왔다는 말에 승희는 대뜸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면서도 봉환의 행방에 대해선 전혀 궁금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그 냉랭한 기색 한 가지를 봐서라도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그 순간 변씨는 눈앞이 아득했다. 그러나 기왕 탄로가 나버린 것이라면, 절제 없는 엽색행각이 갖다준 불상사에 대한 변명이나마 봉환을 대신해 차근차근 들려주고, 승희의 뒤틀린 심사를 달래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변씨의 괴춤을 살짝 잡아끌고 문밖으로 이끈 사람은 승희가 먼저였다. 괴춤을 매몰스럽게 낚아채지 않고, 살짝 잡아끌고 있다는 그 은밀한 거동이 또 다시 변씨를 혼란으로 빠뜨렸다.

승희는 아직 묵호댁의 본색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골목 밖으로 나선 승희는 변씨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 마디를 뜸도 들이지 않고 불쑥 내쏟았다.

"나도 행중 따라서 장꾼으로 나서면 안되겠어요?" "난데없이 이게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술청에선 겨울 자리끼같이 냉랭하던 표정이었는데, 선창가로 나서고부터는 해끔해끔 웃음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전혀 엉뚱한 요청이었다는 것은 승희도 알고 있었던지 한동안은 군소리 없이 걷다가,

"선뜻 접수하시기가 주저된다는 것은 나도 알아요. 그런데 저기 묵호댁 있잖아요. 음식조리하는 솜씨는 내가 신발 벗고 뒤쫓아가도 못 따라 가는 것은 물론이고, 손님들 농담 되받아서 척척 에둘러 넘기는 말주변하며, 심한 농지거리에도 얼굴 한 번 붉히지 않는 넉살이 왔다거든요. 우연히 식당을 찾아와서 파출부 자리를 수소문했던 뜨내기라지만, 알고보니 신분도 확실한 사람이에요. 제가 동사무소에 전화해서 주소지까지 확인해봤거든요. 식당을 통째로 맡겨둔다 해도 사기칠 걱정은 없는 여자예요. "

"정신없는 소리 작작해. 그 여자의 신분이 백두산에 있는 천지처럼 확실하다 하더라도 어째 만난 지가 사흘도 안되는 뜨내기에게 식당을 통째로 맡겨두고 장꾼으로 나설 생각을 하고 있나. 멀쩡했던 여자가 며칠 사이에 쓸개에 쉬가 슬었나? 요새 유행한다는 치매가 들었나? 설혹 실성을 했기로서니 승희 생활기반이 뭣이란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돌아버렸나?" "돌긴요? 돌진 않았으니까, 걱정마세요. 나도 무턱대고 한 말이 아니란 말예요. " 남 보기에 오해하기 알맞게 어느새 팔짱까지 낀 승희는 해죽해죽 웃기까지 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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