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대 할망에게 ‘모성 리더십’을 배워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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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34면

어느 봄날 제주도에서 설문대 할망을 만났다. 그녀는 제주도 창조 신화의 주인공으로, 거대한 몸집으로 유명하다. 이 여신은 또한 다산(多産)하여 500명의 아들을 두었다. 척박한 섬에 사는 이들에겐 먹거리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해 흉년이 몹시 들어 아들 500명이 굶주리며 서로를 탓하고 있었다.

설문대 할망은 사냥을 하라며 아들들을 밖으로 내쫓은 뒤 자신은 죽을 쑬 거대한 솥을 걸었다. 해질 무렵 빈손으로 돌아온 아들들은 구수한 고기죽 냄새에 이끌려 허겁지겁 죽을 먹어 치웠다.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아들이 솥 밑바닥에서 어머니의 뼈를 발견하고 슬피 울며 집을 나가 바위가 된다. 나머지 아들도 뒤를 따라 ‘오백 장군 바위’가 됐다. 이들의 처절한 울음은 매년 한라산을 빨갛게 물들이는 철쭉꽃으로 피어난다고 한다.

이 전설이 주는 감동은 제주 돌 문화공원을 돌아보면서 영감의 수준으로 고양된다. 설문대 할망을 테마로 설계된 이 공원은 어느 촌로의 헌신적 노력과 시대를 초월한 예술혼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을 디자인한 백운철 선생은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제주도에 헌납하는 대신 공원 설계 권한을 받았다. 제주 토박이인 백 선생의 고향 사랑은 드넓은 대지 위에 펼쳐진 건축물과 세심한 환경 디자인에서 알알이 드러나 있다. 큰 자연과 큰 사람, 큰 마음, 그리고 자기희생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돌 문화공원은 영혼에 울림을 주는 곳이다. 자연의 치유, 그리고 모성의 힘이 꾸밈새 없는 자연경관과 마음을 비운 한 인간의 예술혼과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탄성을 멈추지 않는다. 이곳이 우리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찾아온다’며 떠들썩한 광고를 기피하는 백 선생의 고집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어둡게 하고 있는 좌우 갈등과 국론 분열을 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제주 돌 문화공원의 설문대 할망을 떠올린다. 무언가에 주려 있고 화가 잔뜩 나 있는 오백 아들에게 어떤 양식을 주어야 할지…. 게다가 이젠 배만 부르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제각기 다른 입맛과 취향을 한 솥에서 다 맞추어 달라고 아우성이다. 아니, 실은 자기가 원하는 죽만 쑤라고 성화다. 자칫 솥이 깨어질 지경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국방과 외교가 그러하고 젊은이들의 미래를 보장할 경제발전, 미래의 인재를 만들 교육개혁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집안싸움 때문에 자식들의 미래를 망칠 수 없다. 냉철한 이성이 동반되지 않는 즉흥적인 감성만으로는 내일을 설계할 수 없다.

생각해 본다. 자신을 희생한 설문대 할망과 같은 어머니가 우리에게 있는가? 물론 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들의 희생과 헌신을 먹고 자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침입 때 몸 바쳐 조국을 지킨 순국선열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오늘날이 가능했던 것이다. 밤낮 없이 뛰는 기업가에게서 나는 오백 아들을 먹이려고 동분서주하는 할망의 모습을 본다. 소외계층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운동가들의 고단한 삶, 한평생 근검절약으로 모은 돈을 장학기금으로 내는 어르신들, 어려운 환경에서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에게서 나는 큰 할망의 모습을 본다. 큰 사람은 큰 가슴을 지녔으되 큰 입을 가지진 않는다. 요란스럽게 꽹과리를 치지도 않는다.

이제 우리 정치에서도 설문대 할망의 모습을 보고 싶다. 조용히 자신의 뼈와 살을 조국의 미래에 내주는, 그리고 모든 국민에게 상식과 이성이라는 건전한 양식을 먹여 주는 그런 리더가 아쉬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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