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깊이 읽기] 영국 총리, 히틀러에게 두 시간 만에 ‘패’ 드러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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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상회담-세계를 바꾼 여섯 번의 만남
 데이비드 레이놀즈 지음,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688쪽, 2만9000원

‘정상(summit)’이란 말을 외교적 의미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 2월 14일, 에든버러에서 연설하면서 “정상에서의 회담으로 사태가 악화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 것이 효시였다.

산악인들의 영원한 로망인 정상은 이후 국가 최고지도자 또는 그들간의 회담을 뜻하는 외교용어로 자리잡았다.

현대적 의미의 정상회담은 유럽에 전쟁의 암운이 짙게 깔린 1938년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비행기로 네 시간을 날아가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와 만난 것이 첫 사례로 꼽힌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 교수인 데이비드 레이놀즈가 2007년 출간한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역사적인 정상회담들에 관한 치밀한 기록이다. 뮌헨 회담에서 1985년 미·소 제네바 회담까지 여섯 건의 정상회담을 케이스 스터디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방대한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저자는 개별 정상회담에 관한 단편적인 퍼즐 조각들을 짜맞춰, 각 정상회담의 전모가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관계를 유화(전후처리)-억제(대결)-데탕트(긴장완화)-변모(냉전종식)의 4단계로 파악하고, 각 단계를 네 차례의 미·소 정상회담과 결부시킨다. 전후 국제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이 45년 얄타에서 회동한 것이 유화 단계를 상징한다면 케네디와 흐루시초프가 대면한 61년 빈 회담은 억제의 시작이었다. 72년 모스크바 닉슨-브레즈네프 정상회담으로 데탕트의 물꼬가 트였다면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이 만난 85년 제네바 회담은 냉전 종식의 초석을 쌓은 기념비적 회담이었다.

네 번의 미·소 정상회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4악장으로 된 교향곡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면 체임벌린-히틀러의 뮌헨 회담은 서곡, 78년 카터가 중재한 사다트(이집트)-베긴(이스라엘)의 캠프 데이비드 협상은 간주곡으로 삽입돼 있다.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정상회담에 관한 단순한 기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데 있다. 각 회담의 성공과 실패 요인을 분석, 교훈을 도출함으로써 외교적 실용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뮌헨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에 평화가 왔다”고 선언했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양보와 맞바꾼 일시적 평화였을뿐이다. 굴욕적인 ‘유화(appeasement) 외교’의 전형이 된 뮌헨 회담이 결국 실패로 귀착된 것은 어떤 양보를 하든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체임벌린의 나약한 평화 지상주의 탓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총체적 부실의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독일의 공군력을 과대평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체임벌린은 첩보전에서 우선 실패했다. 만난지 두 시간 만에 자신의 패를 드러내 보이는 미숙함도 노출했다. 의회는 물론 내각과도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지 않음으로써 국내 여론 결집에도 실패했다.

악수하고 사진 찍기 위한 사이비 정상회담도 있지만 진정한 정상회담은 정상에 오른 사람끼리 정상에서 벌이는 건곤일척의 진검승부다. 내정의 실패를 단숨에 만회할 목적으로 철저한 준비와 목표 없이 매달리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또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때로는 빈손 털고 일어서는 배짱과 용기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양보안을 최적의 순간까지 감추고 있다가 그 보답으로 더 큰 것을 얻어내는 지혜도 중요하다. 상대의 패를 읽는 능력과 임기응변의 순발력도 있어야 한다. 저자는 특히 상대에게 목표를 정확히 밝히는 것과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는 능력도 중요하고 강조한다. 귀국 후 국민을 설득하는 것도 큰 문제다. 소련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닉슨과 레이건은 의회로 직행했다. 72년 닉슨과 마오쩌둥의 역사적 회담에 관한 기록이 빠져 있는 점은 아쉽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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