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대체한 방황하는 영혼들, 네오 하드보일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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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호 13면

제프 브리지스가 주인공 탐정 매트 스커더로 나온 영화 ‘800만 가지 죽는 방법’(1986)의 포스터

“내 이름은 매트고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그리고 빌어먹을 일이 벌어졌다. 내가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로런스 블록의 『800만 가지 죽는 방법』(1982)의 마지막 장면이다. 주정뱅이들의 금주(禁酒) 모임에서 형편없는 몰골을 보인 건 매트 스커더. 뉴욕의 경찰관이었는데, 강도를 쏜다는 게 실수로 여자아이를 사살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술에 절어 살다 결국 실직하고 이혼까지 당한다. 그 뒤 뉴욕의 싸구려 호텔에서 혼자 살며 무면허 탐정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술에서 도피처를 찾아야 할 정도로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산다는 설정이다.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 ‘알코올 중독’ 탐정 매트 스커더

터프가이 탐정이 주름잡는 정통 하드보일드에선 보기 어려운 캐릭터다. 술 잘 마시고, 주먹 세고, 여자 밝히면서도 칼같은 의식을 지니는 게 그들의 공통점이다. 특히 술을 마다하질 않는다. “뭘 드릴까요”라고 묻는 바텐더에게 기어드는 말투로 “콜라 한 병 주쇼”라고 하는 탐정을 상상할 수가 있나. 와인이나 샴페인도 약하다. 버번이나 스카치, 아니면 보드카는 돼야 폼이 산다. 그만큼 술은 하드보일드 탐정의 남성미를 상징하는 중요한 소도구다.

그런데 이게 과해 필름이 끊길 정도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심한 낙오자가 돼버린다. 그게 바로 스커더다. 터프가이 탐정은 권총으로 뒤통수쯤 얻어맞아야 쓰러지지만, 스커더는 혼자 술을 과음하다 정신을 잃는다. 그러니 믿음직한 터프가이로 보이겠나.

하지만 1970년대엔 그게 오히려 먹혀들었다. 베트남전쟁으로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바뀐 탓일까. 영웅의 해체 작업은 하드보일드에서도 나타났다. 내면의 문제로 방황하는 탐정들이 등장한 것이다. 가정 파탄에, 성격 결함에…. 이 같은 탐정의 사생활은 사건 못지않은 비중을 지닌다. 두 이야기는 평행선을 달리는 게 아니라 하나가 돼 클라이맥스를 향한다. 평론가들은 이런 작품들을 정통 하드보일드와 구별해 ‘네오 하드보일드’라 부른다.

스커더에겐 싸워야 할 상대가 둘이다. 하나는 살인범, 다른 하나는 술의 유혹이다. 『800만 가지 죽는 방법』에선 둘이 서로 무관해 보이면서도 스커더 내부에서 급속히 수렴해간다. 흑인 포주의 의뢰로 고급 창부들의 연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스커더는 선과 악의 경계선으로 내몰린다. 곧 술병을 잡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빠진다. 그러다 발작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는 제정신과 광기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자신을 추스르려고 몸부림친다. 금주를 통해서.

결국 살인범을 처치하고, 술도 끊는다.
76년 『아버지의 죄』로 데뷔한 블록은 초기엔 관심을 못 끌다 다섯째 작품인 『800만 가지 죽는 방법』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국내엔 이 책과 『무덤으로 향하다』가 번역됐다. 긴박한 사건 전개를 좋아한다면 후자를, 스커더의 내면적 갈등이 궁금하다면 전자를 권한다.

사족 하나. 그의 책엔 외국인을 비웃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무덤으로 향하다』에선 한국인에게 집을 판 마약상이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람들은 도대체가 수표라든가, 신용카드, 월급, 세금, 이런 건 상대를 안 하더군. 모든 게 현금이더라고.”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금융증권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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