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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 디자인은 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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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에로플로트를 이용해 러시아에 다녀왔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러시아항공을 타는 것부터 러시아 여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천~모스크바를 운항하는 항공기의 기종도 공교롭게 소련에서 개발한 일류신 여객기였다.

기내는 무척 더웠다. 찬바람이 나오는 에어컨 그릴이 당연히 객석 위에 달렸으리라 생각하고 아무리 살펴봐도 찾을 수 없었다. 승무원에게 항의에 가깝게 물어보았더니 퉁명스럽게 앞좌석 뒷면에 스피커처럼 생긴 동그란 부분을 가리켰다. 이게 에어컨이라는 뜻일 터인데 조작법을 알 수가 없다. 전체를 돌려도 보고 두드려도 보다가 우연히 가운데 볼록한 부분을 위로 올리니 찬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운데 스위치에 아주 작은 화살표가 있어 나름대로 안내는 된 셈이다. 또 다른 스위치가 옆에 있어 움직여 보니 놀랍게도 좌석 뒤판에서 개인용 조명등이 켜졌다. 다른 승객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모든 개인용 시설을 앞좌석 뒤판에 집중시킨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조작이 간편하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효과를 누릴 수 있는 효율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일류신 여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했다. 앞에 달린 에어컨에서 얼굴을 향해 냉기를 쏘아대니 얼굴이 따끔거리고 골치가 아파 왔다. 좌석 밑판은 왜 그리 작은지 허벅지를 압박해 왔다. 좌석 뒤판에 각종 설비를 넣다 보니 뒤판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고, 앞뒤 좌석의 간격을 확보하기 위해 좌석 밑판을 그만큼 줄인 결과다.

기차와 비행기가 발명되던 시절, 이 기계들은 단순히 달리고 날 수만 있어도 위대한 성과였다. 비행기에는 무수히 많은 부속품과 부분적인 기술들이 필요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단 한 가지, 오로지 날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승객을 태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는 복잡해진다. 인간은 기계같이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편리와 쾌락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심미적인 아름다움까지 요구하게 된다. 비행기 디자인과 제작의 목적이 날기 위함을 넘어서 여행의 안락함을 제공하고, 승객의 심리적 즐거움까지 만족시켜야 하게 되었다.

이 복잡하고 미묘한 요구들을 외면하는 기계적 디자인은 결국 인간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종류의 불편은 러시아 곳곳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특급호텔 엘리베이터의 덜덜거리는 소음은 참을 만하다고 하지만, 완충장치가 불충분해 정지 때마다 등뼈가 부서지지 않나 걱정할 정도로 충격이 심했다. 심지어 최근 생산된 특급열차의 1등칸 객석마저 등받이가 고정되어 허리 약한 승객은 조심해야 한다. 승객의 대화를 위해 모든 좌석을 마주보게 배열하다 보니 하는 수없이 좌석 등받이를 고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넓게 말해 소련은 경직된 기계론적 사회주의 체제였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은 한 전문분야에만 충실하면 족했다. 그 결과 스푸트니크 우주선을 미국에 앞서 쏘아 올렸고,올림픽 때마다 최다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할 수 있었다. 현재의 러시아가 민주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했다고 하지만, 적어도 디자인 분야에서만은 아직도 기계론적 시대의식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귀국해 보니 서울은 버스노선 변경과 버스중앙차로제 때문에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대중교통의 효율화를 위해 다른 불편은 감수할 수도 있으며, 이용법이 다 쓰여 있는데도 이를 익히지 못한 시민의 불평일 뿐이라는 서울시장의 당당한 푸념도 발표됐다. 기계적 사고와 디자인이 러시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약력:서울대 건축학과 학사.석사.박사,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저서로 '시대를 담는 그릇' '앎과 삶의 공간'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