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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은 살아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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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그렇게 자라 성인이 된 기자는 최근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경험을 했다. 서울 남산의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20일까지 열리는 ‘비단의 향연-한·중앙아시아 문화교류 축제’를 통해서다.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 문화공연을 한자리에서 보는 드문 기회였다. 놀라웠다. 전통문화와 대중문화를 넘나드는 공연 내용도 그랬지만, 낯선 문화에 대한 우리 관객의 관심과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15일 개막식 직후부터 관람 신청이 몰려들더니, 이후 전 공연이 때이르게 매진됐다. 객석은 머리 희끗한 노부부에서 어린 자녀를 동반한 젊은 부모까지, 말 그대로 남녀노소로 가득 찼다. 대부분 처음 접하는 중앙아시아의 음악과 무용에 흥겹게 장단을 맞추고, 아낌없이 박수를 쏟아냈다.

세 나라의 영화 8편을 상영하는 영상전도 마찬가지다. 카자흐스탄 영화 ‘스탈린의 선물’과 우즈베키스탄 영화 ‘고향’을 필두로, 빠르게 관람 신청이 몰려들었다. ‘스탈린의 선물’은 옛 소련 독재자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 이주를 겪은 다양한 민족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서로를 보듬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려인 역시 그중 하나다. 이런 역사를 이번 공연단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개막 전 무대 밖에서 미리 만난 공연단원들은 ‘겨울연가’ ‘주몽’ 같은 한류 드라마에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고려인의 애환까지, 묻기도 전에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냈다. 우리에 대해 그네들이 아는 것은, 우리가 그네들에 대해 아는 것 이상이었다.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세 나라가 세계지도에 국가로 표기된 것은 91년, 옛 소련이 해체되면서다. 더구나 한반도는 남북 분단과 냉전을 겪어왔다. 아시아가 얼마나 큰 대륙인지는, 책으로만 배웠을 뿐 실감할 기회가 적었다. 변명은 여기까지다.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아도, 지금 아시아는 우리 사회의 일부다. 이번 행사에도 엄마의 모국의 공연을 보러 온 다문화가정 어린 관객들이 눈에 띄었다. 비단길(Silk Road)은 현대에도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의 게임판은 80년대 초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서로의 문화를 아는 것이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다. ‘비단의 향연’은 20일로 막을 내린다. 그 감동이 보이지 않는 씨앗으로 곳곳에 싹트기를 기대한다.

이후남 중앙SUNDAY 문화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