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서리 체제는 빨리 끝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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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회가 총리임명동의안을 끝내 처리하지 못함에 따라 새 정부는 변칙적인 총리서리체제로 출범했다.

새 정부 출범 후 닷새 이상 국정공백 상태가 지속되다가 결국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서리체제가 됐다.

국민들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 줘야 할 새 정부의 첫 조각 (組閣) 이 결국 이런 식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정치의 한계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국회의 투표과정에서 드러난 여야간의 극한적인 힘 대결이 앞으로 어떤 부작용으로 국가 위기를 가중시킬지 걱정이다. 국회를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여야 모두에게 실망했다.

의회정치의 기본이 되는 절차의 문제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수준이니 어떻게 더 큰 타협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한나라당은 기왕 투표에 참여키로 했으면 떳떳하게 법이 정하는 대로 무기명 비밀투표를 했어야지 꼬투리 잡힐 꼼수를 왜 쓰는가.

여당 역시 투표에 참가한 의원들이 가 (可) 든 기권을 하든 부 (否) 든 기표소에 들어갔다 나온 이상 투표함을 물리력으로 점거해 투표진행을 막은 건 문제다.

이는 결국 양쪽이 모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이 없으면서 자기입장은 관철해야 한다는 억지가 빚어낸 결과다.

총리서리체제는 여야 모두에게 최악의 선택이다.

새 정부의 내각을 짜면서 구 (舊) 총리의 제청을 받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법적인 시비를 없애기 위해서라지만 자구 (字句) 를 지키기 위해 법정신 본질을 훼손시켰다.

국회에서 임명동의안 처리가 분명하게 매듭 안된 상황에서 성급하게 총리서리를 임명한 것도 문제다.

야당은 위헌을 주장하며 총리서리 직무정지가처분신청을 내겠다고 하니 불씨를 뻔히 보고 무리한 결정을 한 것이다.

설령 서리체제가 불가피한 조치로 당장은 받아 들여진다 해도 현실적으로 여야간에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야대 (野大) 의 국회에서 야당이 총리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람을 서리로 임명해 놓고 정상적인 행정부와 국회 관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정국은 더욱 대결로 치달을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국정의 마비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야당 역시 큰 부담을 안게 됐다.

새 정부의 정상적인 출범을 막았으니 향후 전개될 국정 난맥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게 됐다. 나라가 정상적인 상태라 해도 이러한 파행은 혼란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는데 지금 같은 위기 시기에 정치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니 나라 장래가 정말로 걱정된다.

이러다가는 위기극복이고 뭐고 나라가 폭삭 주저앉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장 책임이 큰 정치권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무슨 말로 국민의 희생과 단합을 설득하겠는가.

서리체제로는 결코 여야의 경색국면을 풀 수 없으며, 위기극복을 위한 국회의 뒷받침도 이끌어낼 수 없다.

국정공백을 피하기 위해 총리서리체제로 출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해도 이 체제를 오래 끌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김종필 (金鍾泌) 총리체제가 순리라는 점을 이미 몇차례 밝혔다.

그러나 지금 야당이 명백한 반대의사를 밝혔고, 문제가 법적.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정국이 풀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金총리서리가 대승 (大乘) 적 입장에서 스스로 매듭을 풀어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것이 어렵다면 여야가 빨리 국회를 다시 열어 가결이든 부결이든 인준안 처리문제를 매듭지어 새 행정부가 정상적인 체제로 출발을 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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