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행진곡의 비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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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34면

5월에는 유난히 청첩장이 많이 돈다. 푸릇푸릇한 신록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꾸리려는 청춘 남녀들의 고운 자태는 보는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이른바 짝짓기의 계절이다. 이러저러한 짝짓기의 예식에 나는 하객으로 불려 다닌다. 판에 박힌 주례사를 들을 때마다 결혼과 가정에 관해 곰곰 생각해 본다.

젊은 청춘들은 왜 그렇게 결혼 스토리에 열광할까. 청춘의 끓는 호르몬 때문? 정서적·경제적 안정을 위해? 부모님과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간혹 절체절명의 사랑도 없진 않지만 상당수는 그저 좋을 것 같기에 결혼하지 않을까 싶다. 이성에 끌리는 막연한 감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러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오호, 어떤 낯선 사람이 내 곁에서 자고 있네, 이를 어쩌나! 존재의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는 순간이다.

이혼한 한 친구가 언젠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동물은 암수가 서로 안 싸우는데 인간은 왜 그토록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아? 다들 짝짓기를 했으면 빨리빨리 제 위치로 가야지 계속 그대로 붙어 사니 그렇지!” 엄청난 독설이다.

그의 말마따나 결혼이 리비도(성욕)의 충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심히 비효율적인 제도다. 결혼 제도는 리비도의 자유 행사를 방해한다.

그렇다고 결혼이 정서적 안정을 보장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선진국 모임인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의 높은 이혼율이 이를 대변한다.

만약 결혼의 목적이 경제적 안정이라면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때 가정은 깨어진다. 경제위기가 닥칠 때마다 가정이 붕괴되고 아이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것을 보라. 절체절명의 사랑? 불같은 사랑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의 후일담은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는 진부한 명제를 증거하고 있다(그렇지 않은 행복한 부부가 있다면 경의를 표한다).

도대체 왜, 우리는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려 하는가? 내가 경험하고 목격한 바는 이렇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독립할 즈음 누구나 세상을 홀로 대하는 데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인생 길을 함께 갈 파트너이자 협력자를 구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이 파트너십이 종종 ‘거래(exchange) 관계’라는 것에 있다. 단지 돈이나 지위만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의 성격, 가정에 대한 헌신도, 상대방 가족에 대한 배려 등 모든 게 자기를 중심으로 한 거래 관계로 형성된다. 당연히 부부싸움이 따른다. 거래에서는 항상 서로 셈이 다르기 마련이니까.

결혼을(또는 사랑을) 이런 감정적 거래로 보는 이상 우리는 행복할 수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우리’는 없고 고독한 소비 주체인 ‘나’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우리’로 승화할까? 우리의 몸뚱이는 극히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따로따로 존재하는데. 생김새가 다른 만큼 생각과 감정도 다른데. 해답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 인간의 가정은 본능에 따르는 동물 가족과 다르다. 그렇다고 우리가 경제활동을 위해 가정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힘들고 거친 인생 길에서 안식처라고 생각하기엔 가정 자체를 위해 짊어져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는 ‘가정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인격이 공동 문화를 만들어 가며 한 마음,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게 아닐까. 가정이라는 인류만의 독특한 문화는 자연에서 시작하지만 자연과는 다른 인위적인 선택의 요소가 분명히 있다.

그중에는 좋은 문화도, 나쁜 문화도 있을 것이다. 가정을 통해 우리는 ‘문화 생산자’가 돼 후손에게까지 문화적 DNA를 물려줄 수 있다. 그걸로 유한한 인생을 극복한다. 결혼은 바로 그것을 향한 달리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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