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노동시장의 유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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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와 함께 대량실업 시대가 다가왔다.

갈피를 잡지 못한 정부, 빚투성이 기업, 흥청거리던 가계가 결국은 일할 능력과 의욕에 넘치는 수백만 근로자들을 실업 (失業) 이란 망망대해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실업의 폐해는 실로 심각하다.

개인에게는 깊은 좌절과 상실감을 안겨주고 가족에게는 생계수단의 박탈이라는 현실적 고통을 강요한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실업은 결코 반길 일이 못된다.

인적자본에 대한 그간의 투자를 일시에 물거품으로 만들 뿐 아니라 퇴직금의 일시지불이라는 현실적 부담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실업은 범죄와 마약,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키며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부채질한다.

그러기에 피할 수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하더라도 실업, 그것도 대량실업만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IMF와 국제사회가 이같은 상황을 강요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도 살길을 찾기 위해 실업이라는 극약처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실업은 우리 사회의 선택이 아니라 당위가 되고 만 셈이다.

그런데 우리 경제는 일찍이 이와 같은 대량실업을 경험한 예가 없었다.

따라서 실업에 대한 관리체계가 허술하다.

그러기에 그 대책 마련에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여러 차례 대량실업의 위기를 겪었으며 그때마다 새로운 실업의 관리기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선진국에선 이미 보편화돼 있는 무임금 휴직제도와 재고용 (recall) 제도다.

한마디로 말해 이 제도는 불경기엔 잉여인력을 무임금으로 휴직시키고 호경기엔 이들을 순서대로 다시 불러 일하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영구실업에 대한 근로자의 공포심과 불안감을 줄여 주고 사용자들에게는 경기 회복때 신규인력의 교육에 소요되는 막대한 교육비를 절감케 해준다.

사회적으로도 대량실업과 완전실업의 충격을 완화해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인 제너럴 모터스 (GM) 의 한 부품 공장의 경우 자동차가 잘 팔리면 세 개의 생산라인을 가동시키지만 불경기에는 두 개만 가동시킨다.

따라서 나머지 한 개의 생산라인에 배치됐던 근로자들은 자동 휴직된다.

물론 보수 없는 휴직이다.

그러나 이들중 아무도 자신들이 GM을 영원히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기가 좋아지면 회사가 이들을 휴직된 순서대로 다시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휴직자들이 전원 복직될 때까지 신규채용은 엄격히 제한된다.

일시 휴직된 근로자들은 휴직기간 동안 결코 놀고 먹지 않는다.

용접공.우유배달.택시기사 등 닥치는대로 일하며 개중엔 새 일자리를 얻어 이직하는 경우도 생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기순환은 필연적이며 일거리 없는 직장에서 놀고 월급을 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이들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일시적 실업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선진국에서는 노동시장이 경기변동에 따라 유연히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기업도 살고 근로자도 산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불황은 곧 경기반전의 신호탄이다.

우리 경제가 지금은 IMF의 직격탄에 맞아 앞이 안 보이는 나락에 빠져 있지만 환율하락에 따른 가격경쟁력 회복으로 수출전열이 다시 정비되면 숙련된 근로자들이 긴요히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절실히 바라고 있듯이 이 지긋지긋한 IMF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가서 경험있는 숙련공들을 무작정 방출했던 무계획성을 후회하지 말고 이들을 무임금 휴직으로라도 붙들어 두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대한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의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박명광<경희대교수·미국 동서문화센터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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