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현지르포…32년 독재 수하르토 "휘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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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자카르타의 국회의사당 주변에서는 지난 13일 '매우 진기한 일' 이 발생했다.

학생 30여명이 모여 수하르토 (77)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슬람교도 학생 20여명도 이날 로렌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부장관이 회담중인 재무부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엄격한 철권통치가 계속돼 온 인도네시아에서 가두시위, 그것도 '대통령 퇴진' 을 요구하는 시위는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대역죄' 로 몰릴 일들이 현재 자카르타에서는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경제위기가 가져온 공황이 통치기반마저 급격히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수하르토 퇴진요구가 일과성 현상이 아니라는데 인도네시아 정부의 고민이 있다.

국민들의 반 (反) 수하르토 정서가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권세력의 동요가 겉으로 드러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다.

집권 골카르당의 하르모코 총재는 14일 "인도네시아는 앞으로 5년동안 수하르토 대통령이 다시 이끌 수밖에 없다" 며 수하르토 후보지명 방침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현실은 수하르토 진영에 점차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경제위기를 계기로 집권세력의 부패.무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탓에 집권세력에 대한 염증이 열병처럼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카르타 시내에서 만난 한 택시운전기사는 "수하르토는 당장 물러나야한다.

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권력에 매달릴 염치가 있는가" 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편 인도네시아 최대 화교재벌인 살림그룹의 임소리옹 회장은 정부의 설득을 받아들여 해외로 반출했던 모든 외화자산을 빠른 시일안에 국내로 반입하겠다고 다짐했다.

현지 신문인 미디어 인도네시아는 상공회의소 간부들과 중앙은행 총재와의 면담과정에서 임소리옹회장이 재산반입을 약속했다고 전했다.

자카르타에는 화교계 재벌들이 6백억달러 이상, 수하르토 대통령 가족들이 1백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해외로 반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이 루피아 가치폭락의 중요 배경으로 지적돼 왔다.

자카르타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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