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새 틀로 다시 시작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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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98년은 한국경제가 실질적인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고 첫번째 맞는 해다.

모든 경제주체는 올해 저 (低) 성장과 경기후퇴, 기업도산과 고 (高) 실업, 그리고 물가고를 감내할 각오가 돼있는지를 시험받는다.

그 시험은 우선 두 갈림길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한쪽은 실패를 거울삼아 재도약의 터전을 마련하는 길, 다른 한쪽은 거기에 굴복하고 좌절하는 길이다.

실패에 굴복하고 좌절하는 길은 쉽다.

실패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하고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면 된다.

그러나 극복과 도약의 길은 어렵다.

실패를 자초한 기존의 틀을 바꾸고 좌절을 불러온 낡은 생각을 고치면서, 또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기란 지난 (至難)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형극 (荊棘) 의 길이며 고난의 행진이다.

그런데, 민족적 자존심이 이 어려운 길을 택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증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왜 실패했는가에 대해선 수많은 진단이 있어 왔다.

경제파국의 직접적 원인은 외환위기지만 이것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병폐가 터진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이 구조적 병폐가 깊어진 것은 정부나 기업.가계의 경제운용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은 틀, 묵은 사고방식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정부의 경제 리더십은 방향감각을 상실했고 기업은 확대성장에만 사로잡혔으며 가계는 분수를 넘는 소비를 일삼았다.

그런가 하면 사회 각계각층은 모두 제몫 찾기에만 분주했을 뿐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선 무심했다.

거기다 수명이 다해 진작 폐기됐어야 할 제도적 장치들은 변화를 지향하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막아 왔다.

이 실패를 딛고 새로운 도약의 길로 들어서려면 기존 경제운용의 틀을 완전히 새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의 발전기조는 확대였지만 앞으로는 축소로 나가야 한다.

외형보다 내실을 기해야 하고 과속은 저속으로 늦춰야 한다.

사익 (私益) 추구에 앞서 공동체를 생각하고 변화를 가로막는 묵은 제도와 낡은 방식은 모두 혁파해야 한다.

이것은 위축이 아니라 재정비며 퇴보가 아니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이다.

정치 리더십의 초점은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는데 모아져야 한다.

그 능력은 비전과 목표를 뚜렷이 내걸고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국민에게 제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 연후에 고통을 감내하면서 국력을 결집시키는 통합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리더십의 진면목이다.

경제는 방만한 경영에 종지부를 찍고 생존능력부터 기른 뒤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외형성장을 위해선 과다차입도 불사하는 확대 일변도의 과거 발전방식은 실패했다.

실패한 과거의 틀을 부수는 데서 오는 고통을 자업자득 (自業自得) 으로 여기는 겸손을 발휘하면 도약의 새 틀은 쉽게 마련될 수도 있다.

경제발전을 뒷받침해 온 종래의 제도적 장치는 지금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식 (腐蝕) 될대로 부식됐다.

위기에 빠진 기업을 회생시켜야 할 금융제도가 흑자기업마저 도산시키는 현실이 그것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반신불수의 금융제도를 혁파하는 작업은 살을 베는 아픔이 뒤따르겠지만 지금 손을 안대면 전 경제 시스템이 붕괴될지 모른다.

진입과 퇴출이 자유스럽고 최대한의 효율이 보장되는 틀로 바꿔야 한다.

살림규모를 줄여야 하는 가계는 좌절감부터 앞서겠지만 원래 전쟁의 폐허 위에서 오늘의 기적을 이룩한 것이 우리 아닌가.

압축성장의 속도가 너무 빨라 부화 (浮華) 스런 느낌마저 준 생활방식을 새로운 합리의 틀로 바꾸면 고통은 반감될 수도 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틀은 진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그럼으로써 세계 경제전쟁에서도 선두그룹에 들 수 있는 틀이어야 한다.

우리는 IMF 관리체제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이런 틀을 만들려고 했다.

이제야말로 경제에는 국경이 없고 경제전쟁에는 한계가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그럼으로써 세계화된 한국인이 능숙하게 운영할 수 있는 새로운 발전전략을 짜야 한다.

그런 새 틀을 짜려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헌 판을 쓸고 새 틀을 짜기를 겁내면 발전과 도약의 전기 (轉機) 를 잡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어느 나라에나 실패와 좌절은 있는 법이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나는 쪽에는 영광이 기록되고 거기에 굴복하는 쪽에는 패배 (敗北)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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