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그래도 미래를 생각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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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제통화기금 (IMF) 의 금융지원을 받으면서도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우리 경제를 보면서 1년전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 수준에 올랐다고 자랑하던 한국경제의 실상이 이랬던 것이로구나 하며 참담한 심정을 갖게된다.

특히 그 거품의 허울이 벗겨지는 속도가 매우 빨라 아무 예고없이 찾아온 해고위협과 극심한 경기침체의 고통은 일반 시민들에게는 마치 청천벽력과 같다.

생계의 어려움이 갑자기 닥쳐왔으니 이들이 분노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러기에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사람들에 대한 책임 추궁 여론이 비등하고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책임 소재에 대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책임 소재 공방이 분풀이의 대상을 찾는 마녀사냥식 논쟁이 돼선 안된다.

그보다 이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원인 규명의 계기가 돼야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는 책임 회피 공방이 주 (主)가 되어 진실 규명을 위한 진정한 토론의 장이 되지 못하고 있다.

표를 얻기 위해선 못할 일이 없는 정치권은 논외로 치더라도 정부와 기업, 그리고 학자들간의 논의에서도 서로 '네탓이오' 만을 주장한다.

정부는 국민들의 과소비를 탓하고, 기업가는 금융기관의 보신주의와 이기적 행태를 비난하며, 금융가들은 정부의 과도한 규제가 자신들을 묶었다고 변명한다.

학자와 언론들은 이들 모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모두가 거듭나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번 사태의 진전은 한국을 이끌어 온 전문가집단의 총체적 부실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식자 (識者) 와 언론들은 금융위기를 미리 막지 못한 재정경제원의 예측능력 부재를 비난한다.

그러나 본인의 기억으로는 재경원뿐 아니라 한국의 수많은 국책 및 민간경제연구소에서도 이러한 위기의 위험성을 책임있게 제시한 일이 없었다.

또 막강한 경제팀을 운영하고 있는 언론들도 미리 국민여론을 환기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금융위기와 IMF 구제금융 가능성을 가장 먼저 보도한 언론은 외신이었다.

마치 '한국경제' 라는 환자를 가까이서 지켜본 주치의 (主治醫) 와 주위의 많은 전문의들은 위기 증상을 포착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본 국외자가 먼저 알아낸 꼴이다.

그러고는 응급상황이 벌어지자 모두 주치의만 손가락질하고 있다.

이번 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지목되는 기아사태와 금융개혁법안 처리과정에서도 여론 지도층이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럽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그저 '당사자들이 협의해 조속히 처리하라' 는 식의 형식적인 처방만 했던 것은 아닌지, 필요할 땐 인기없는 의견이라도 소신있게 주장해야 하는데 이해집단들의 눈치를 보면서 망설인 일은 없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처해 있던 위기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탁상공론만 한 적은 없었는지 자성 (自省) 해볼 일이다.

금융위기 사태가 불거진 뒤에 일부 전문가들이 내놓은 해법이라는 것도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예를 들어 주요재벌의 경영인들이 주장한 '기업부채상환유예' 방안은 비전문가가 보더라도 극약처방인데 우리의 '한국경제' 란 환자는 이 위급상황을 넘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앞으로도 오랫동안 건강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생각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지금 고통이 심하더라도 몸의 전체적인 균형을 회복시킬 처방을 줘야지 일시적으로 고통을 줄이는 마약을 주사하거나 한가지 병을 쉽게 고치기 위해 몸의 다른 기관을 모두 망칠 약을 주어선 안될 것이다.

국민 모두가 당황하는 때일수록 사회지도층은 눈앞의 사태 처리에 급급해 우왕좌왕하지 말고 장기적인 방향감각을 지니고 대책마련을 해야 한다.

특히 미래의 재도약을 위한 국가 기본역량마저 파괴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지적하듯이 우리가 앞으로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우수한 인력 양성과 기술력 획득뿐이다.

이 분야는 전문지식인들이 본래의 역할을 해야 할 영역이며 또한 반드시 투자만이 성패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행히 지난주 정부는 과학기술혁신 5개년 계획을 확정했고 주요 대선후보들도 이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식인과 정부가 합심해 효율적인 교육개혁과 과학기술 진흥이 계속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오세정 <포항공대 방문교수.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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