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기록관은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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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분석“규모는 조촐하지만 의미는 크다. 민주화 쟁취의 실감 나는 현대사 공간이 될 것이다.”(김수한 전 국회의장) 9일 열린 ‘김영삼(YS) 대통령 기록전시관’ 기공식에 대한 감상이다. 위치는 경남 거제시 장목면, YS가 태어난 생가(生家) 옆이다. 부지 1347㎡, 2층짜리 건물(연면적 594㎡)이다. 내년 4월에 문을 연다. 사업비(34억원)는 거제시가 모두 댄다.

전직 대통령 고향에 본격적 기록관 설립은 처음이다. 김형인(외국어대·미국사) 교수는 “대통령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중앙정부 지원은 없다. 건물이 작다. 연면적 3000∼5000㎡가 돼야 법적 ‘개별 대통령 기념관’으로 인정받는다(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전직 대통령 예우 법의 혜택도 없다. 김대중(DJ) 도서관은 노무현 정권 때 그 법으로 60억원을 지원받았다.

기공식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거제시 의회는 2002년부터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한쪽에선 YS 임기 말 IMF 환란, 예산 부담을 들어 반대했다. “자학(自虐)적 역사관을 가진 노무현 정권에선 쉽지 않았다.”(YS 비서실 관계자) 기록관 건립 풍토는 허약하다. 만성적 이념갈등, 전·현직 대통령 간 반목, 실패를 먼저 들춰내는 사회 분위기가 걸림돌이다. 김 교수는 “‘노무현 패밀리’ 수사는 전직 대통령들의 권력부패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그것이 전직 대통령 문화 확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기록관 모델은 미국이다. 무능과 부패로 찍힌 ‘최악의 대통령’들도 기록관·박물관을 갖고 있다. 대통령들은 민간 모금으로 고향·연고지에 건물을 짓는다. 퇴임 무렵 국가에 넘겨 ‘대통령 도서박물관’(Presidential Library & Museum)으로 출범한다. 그 정신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대통령의 공적을 다음 세대의 비전·지혜로 키우고, 과오에 대해선 경계·교훈으로 삼자는 게 미국 대통령 리더십 문화다.”(조지형 이화여대 교수·미국헌법사)

김영삼 전 대통령과 부인 손명순 여사가 9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대계마을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있다. 왼쪽부터 맹형규 청와대 정무수석, 서청원 친박연대 대표,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보,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김 전 대통령 내외, 김수한 전 국회의장, 김봉조·김기춘 전 의원. [연합뉴스]


김호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노무현 정권 부패 등 권력 타락도 현대사다. 전직 대통령들의 공과(功過)를 함께 봐야 한다. 이들이 앞장섰기에 건국→산업화→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식 기록관은 없다. 그가 살았던 이화장은 여전히 잊혀진 역사다. 그곳에서 건국정부의 조각(組閣)이 이뤄졌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은 10년째 표류 중이다. 정치적 반대편에 섰던 DJ정권의 결단 형식으로 1999년 시작한 사업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 결정적으로 시들해졌다. 국고 보조금이 끊겼다. 민간 모금이 부실하다는 이유였다.

김대중 도서관은 한국 최초의 대통령 기록관이다. DJ는 2003년 2월 퇴임 때 자신의 아태평화재단 건물(동교동 집 옆)과 사료(1만6000점)를 연세대에 기증했다. 2006년 11월 문을 연 전시실 규모는 아담하다. DJ의 정치적 역정을 담은 전시물은 짜임새 있다.

국가기록원은 역대 대통령 9명의 ‘통합 기록관’을 추진 중이다. 행정복합도시에 짓기로 하고 예산(1100억원, 2007년)을 배정받았다. ‘개별’이 아닌 ‘통합’ 기록관은 실패를 예고한다. 최평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대통령마다 국정 컨셉트가 다르다. 사료를 한군데서 전시하는 것은 싸구려 비빔밥이 된다. 미국처럼 ‘개별’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이명박 정권은 대통령 기록관의 철학과 비전을 내놓지 못한 상태다. 정부가 개별 기록관 건립에 앞장서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넘어 통합의 리더십 브랜드를 정립하는 길이다.”(김호진 교수)

박보균 정치분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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