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비즈] 미수 맞은 김신권 한독약품 명예회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내 인생에 신뢰가 없었다면 마이너스에서 유(有)를 만들어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8일 서울 역삼동 한독약품 본사에서 만난 김신권(88·사진) 한독약품 명예회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69년 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를 떠올렸다. 김 명예회장은 제약업계의 대표적인 1세대로 14일 미수(米壽·88세)를 맞는다. 그는 고령에도 한독약품이 세운 비영리재단인 한독제석재단을 통해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 나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주경야독으로 약점상 면허를 땄는데 자금이 없었어요. 교회 집사가 나를 잘 봤는지 지금 돈으로 5000만원 정도를 무이자로 빌려줬어요. 지갑이 마이너스인 상태에서 출발한 거죠. 약방을 차린 뒤 나름대로 이자를 꼬박꼬박 쳐서 줬고 나중에 원금까지 갚았습니다.”

김 명예회장은 인터뷰 내내 신뢰를 유난히 강조했다. 그는 19세에 중국 단둥(丹東)에서 약방을 처음 열었다. 해방 후엔 신의주에서 약방을 경영하다가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가 국제시장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54년 7명이 힘을 모아 연합약품을 세웠다. 이 회사는 현재 연매출 2700억원의 중견 제약사로 성장한 한독약품의 모태다. 회사 경영은 신뢰가 바탕이 됐다고 했다. 57년에는 독일 훽스트(현 사노피-아벤티스)와 기술제휴를 했고 64년부터는 합작관계로 발전했다. 두 회사 간 신뢰가 없었다면 지탱할 수 없는 동업의 연속이라는 설명이다.

노사 관계도 신뢰경영의 연장이었다. 직원에게 노조를 만들어 보라고 제안한 것도 그였다. 75년 그가 독일을 다녀온 뒤 생산직 근로자에게 “독일에서는 노조가 사원의 권익을 대변하던데 우리도 하나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그는 “주5일제도 다른 회사보다 먼저 실시했고, 대우도 잘 해주니 노사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었다”며 “외환위기 때도 노조가 먼저 임금협상을 회사에 맡기더니 지난해 말에도 회사에 위임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약업계에 종사하면서 가장 잘한 일로 “한 우물만 계속 판 것”을 꼽았다.

“80년대 훼스탈(소화제)과 캄비손(피부질환 연고)은 이민 가는 사람이 대량으로 살 정도로 사랑 받았죠.”

기업인은 기업을 통해 고용을 확대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경영철학이다. 이를 위해 64년 한독의약박물관을 세웠고 2006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한독제석재단을 만들었다. 그는 “여생을 재단의 사회 공헌 활동에 바치고 싶다”고 했다. 특히 김 명예회장은 장학 사업에 애착이 많다. 그 스스로 “공부하지 못한 설움이 가장 컸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다 중퇴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50년대 이북도민회의 추천으로 건국대 경제과에 입학했지만, 그는 졸업식장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 일을 병행하면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는데, 내가 졸업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가정교사를 고용해 배움을 충족했죠. ”

그는 후배 경영자에게 “신용과 노력에 바탕한 정도 경영을 하고 사회에서 존경 받는 기업인이 되라”고 조언했다.

심재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