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국회의장도 모자라 영부인까지 수사받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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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전방위로, 총체적으로 권위가 무너져내리고 있다. 권위의 생명은 도덕성이다. 박연차의 입에서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개미떼가 그 도덕성을 갉아먹으면서 권위의 기둥들이 흔들리고 있다. 지도력의 권위가 무너지면 무엇이 공동체를 지탱할 것인가. 국민은 개탄에 지쳤고, 후일(後日)에 불안하다. 가뜩이나 경제위기가 짓누르는데 텅 빈 마음속에 권위를 다시 세우자니 허덕허덕 힘에 부친다.

박연차 사건은 부패 스캔들의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군부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정권 이후 전직 대통령이 직접 수상한 자금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된 것은 처음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안기부 계좌를 통해 비자금을 여당에 지원했다는 ‘안풍(安風)’ 사건에 연루됐지만 검찰 수사를 받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대북 송금 사건에 휘말렸지만 개인 비리는 아니었고 수사의 직접 대상도 되지 않았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인 또는 가족 비리 혐의를 받고 있다. 인권변호사 출신이 그렇게 됐다. 입만 열면 정권의 도덕성을 주창하고 ‘가진 세력’의 부패를 공격했던 대통령이었다. 전직 영부인이 검사 앞에 앉게 되는 것은 한국 역사상 처음이다. 그것도 퇴임 후의 일이 아니라 재임 중의 자금 의혹 때문이다. ‘영부인 의혹’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흔치 않으니 국가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도덕성을 표방하던 노 전 대통령의 검은돈 연루에 배반감을 느낀 데 이어 영부인까지 끌어들이는 구차한 모습에 더욱 실망하고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돈이라고 떳떳하게 나서지 못함으로써 결국 영부인까지 검찰에 소환되는 험한 꼴을 자초한 것이다.

스캔들의 커튼이 올라가면서 국민은 이미 많은 등장인물을 봤다. 대통령의 형, 친구, 조카사위, 핵심 측근, 청와대 수석비서관, 현 정권의 비서관, 노무현 그룹의 의원들과 한나라당 의원들…. 그런데 최근엔 전직 국회의장 2인이 검찰에 불려갔다. 김원기 전 의장은 정치인 노무현의 정치 스승으로 불렸던 이다. 박관용 전 의장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때 의사봉을 두드렸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 “대한민국은 전진해야 한다”고 외쳤다. 회고록에선 “다시 그때가 와도 의사봉을 잡겠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전진이 이것인가.

행정부는 대통령과 그의 아내·형에서부터 청와대 관료까지, 입법부는 국회의장에서부터 여야와 중진·초선을 망라한 의원들까지, 사법부는 전별금을 받은 판사들까지, 검찰·경찰은 고위 간부에서부터 지방 공권력 책임자까지 모두 박연차의 자장(磁場) 속에서 맥을 못 추었다. 이 나라의 권력과 행정을 구성하는 중추지대에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는 것이다. 의혹은 현 정권으로도 흘러들어가 지금 대통령과 매우 친하다는 인사들이 국민의 시선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하다가 이 사회가 여기까지 오게 됐는가. 전직 대통령 2명이 비자금으로 법정에 섰던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데, 대통령의 아들들이 줄줄이 감옥에 갔던 기억이 또렷한데 왜 한국 사회의 권위집단은 검은 자금의 거미줄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국민은 이제 어떤 지도자 그룹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가. 무너져내리는 권위의 파편이 가슴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