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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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한국 경제의 장래를 보는 외국인들의 시각이 거칠어지고 있다.

기업의 연이은 부도 가능성과 금융기관의 부실, 그리고 위기관리능력에 많은 허점을 보이고 있는 정책운용체제에 정치적 불안까지 겹치면서 국제상업은행.증권회사 등 외국인 기관투자가들의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비관적 전망 못지 않게 외국인들의 한국 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의 골도 깊어가고 있는데, 이제는 공공연하게 한국 기업의 재무제표와 금융기관의 부실자산 통계마저 의심하고 있다.

금융시장 개방을 포함한 정부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회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정부의 외채보증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물어오기도 한다.

현재 국제금융시장에서 기본금리에 2%포인트의 프리미엄을 추가로 지불해도 우리나라 은행이나 종금사들은 제대로 차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내년에도 80억달러가 넘을 경상수지적자를 보전 (補塡) 하고 외국환은행의 단기차입을 차환 (借還) 하려면 어림잡아 4백억달러의 외채를 조달해야 한다.

국제금융시장 참여자들의 행태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쉬운 편은 우리이고 보면 이들과 정면으로 부닥치기보다 그들의 불평이나 정책제언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의 사고와 정책운용체제를 바꾸어 국제금융시장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지난 며칠동안 국제금융시장에는 정부 개입이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보다 오히려 외환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예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사태가 이처럼 긴박해진 이상 임기응변적인 대응만으로 버텨나가기보다 급한대로 한국의 외환위기설부터 진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환율정책을 포함한 종합적인 제도개편을 추진해야 한다.

현재 외환시장에서는 국내외 투자자.기업 가릴 것 없이 모두들 환율은 앞으로 더 오를 (절하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금의 경직된 시장여건으로 보아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으로 절하 기대를 꺾을 수는 없다.

외국의 경험을 보면 이러한 기대는 환율의 절하로 해결해야 후유증도 없고 비용도 적게 든다.

우리도 한때는 97년 이후에 자유변동환율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던 계획을 상기해 환율의 조절로 외환시장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도록 환율의 일일 변동제한폭을 확대해야 한다.

외환시장이 안정되면 주식.회사채 시장 등 기타 금융시장도 안정을 되찾아 갈 것이다.

산업.기업, 그리고 금융기관의 구조조정도 서둘러야 한다.

앞으로 기업의 부도를 시장원리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면 좀 더 구체적으로 기업의 합병.통폐합.퇴출과 관련된 규제를 어떻게 완화하고 기존제도의 어디를 보완할 것인지 밝히고 이러한 정책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무려 20조원이 넘는다는 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을 처리하자면 얼마만큼의 재원이 필요하고, 그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를 분명히 제시해야 할 것이다.

부실 금융기관도 정리를 하든, 통폐합을 하든 그 처리 방안을 강구해 더 이상의 부실이 쌓이지 않게 하지 않는다면 외국 금융기관의 비관적인 시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우리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장부를 믿지 못한다면 그들이 믿을 수 있는 회계법인들이 부실기업이나 부실금융기관의 장부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가 발견되면 과감히 개편할 수 있는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단기채권시장의 개방, 기업의 해외증권 발행및 현금차관의 자유화 일정을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구조조정과 제도개편은 별로 새로운게 없다고 하더라도 모두 하나로 묶어 강력히 추진할 의지를 보인다면 종합적인 대책으로 발표해 외국인 투자가들의 불신이나 우려를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종합적인 대책을 몰라 주저하고 있는게 아니라 정치권의 이해와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새 정부가 들어설 내년 3월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항변할 것이다.

우리는 기다린다고 하지만 국제금융시장이 기다려 주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며,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정부와 정치권 모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에 있다.

박영철 <고려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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