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병상의 시시각각

일그러진 권력의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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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박 회장이 폭탄주를 돌렸다. 폭탄주의 기본 예법에 따르면 제조한 사람이 먼저 마시고 돌려야 한다. 검찰은 폭탄주 문화에 익숙하며, 예법에도 엄격하다. 그런데 폭탄주를 제조한 박 회장은 먼저 마시지도 않고 돌리기부터 했다. 당연히 술잔을 받은 검찰 간부가 “본인이 마시고 건네는 게 예법”이라며 거절했다. 박 회장은 “술 마시는 데 무슨 법이 있느냐”며 계속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검찰 간부의 입에서 “이런 뽕쟁이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른 검찰 간부까지 나서 박 회장을 꾸짖었다. 그러나 박 회장도 지지 않았다.

다음 날. 그 검찰 간부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학선배 A씨였다. 그는 검찰 간부에게 부탁했다. 박 회장이 ‘종업원들 앞에서 망신당했다’며 억울해하니, 먼저 전화해 화해 좀 해달라는 것이다. 다른 한 검찰 간부에겐 또 다른 대학선배인 B씨가 역시 같은 취지로 화해 전화를 당부했다고 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박연차 회장과 다투었던 두 검찰 간부는 이미 최고위 공직을 마치고 은퇴했다. 박 회장은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A씨는 이명박 대통령과 절친한 여권 내 실력자로 불린다. B씨는 현 정부의 요직을 지냈다. 두 사람은 모두 박 회장 사건과 관련돼 이름이 회자되고 있다. 어지럽게 얽힌 권력의 군상이다.

저녁 자리에서 박 회장의 치부를 찌른 한마디는 ‘뽕쟁이’였다. 박 회장은 1990년 연예인과 함께 마약을 복용하고 매춘 행각을 벌인 혐의로 도피하다가 구속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검찰이라는 사정권력의 중요성을 깨달은 계기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이후 박 회장은 검찰 간부들과 친하게 지내려 애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전엔 돈 버는 데 필요한 세무권력(노건평·부산지방국세청 근무)과 친했다고 한다. 물론 정치권력엔 일찍부터 공을 들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박 회장을 ‘권력자 관리의 천재’라고 부른다. 힘이 있는 곳은 모두 관리했다. 정치권의 경우 80년대 말 이후 지금까지 다섯 번의 정권을 넘나들며, 여야를 막론하고 관리했다. 관리수단은 당연히 돈. 관리술의 요체는 두 가지. 첫째,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이권을 바라는 ‘업자’라기보다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동지’임을 강조한다. 일찍부터 시작해 현직을 물러난 이후까지 관리한다. 둘째, 상식 이상의 거액을 쾌척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10배의 거액을 내놓아 감동을 준다는 얘기도 있다. 결과적으로 박 회장은 통 크고 의리 있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허구다. 박 회장이 노건평씨의 도움을 받아 농협으로부터 휴켐스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얻은 특혜만 320억원이라고 한다. 노씨의 요구에 따라 출마자에게 5억원 건네는 것쯤은 조족지혈이다. 박씨를 알지만 관리대상엔 포함되지 않는 어떤 사람은 그를 ‘구두쇠’라고 불렀다. 권력관리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돈을 잘 쓰지 않는다는 얘기다.

박 회장은 또 자신과 가족의 구명을 위해 검찰에서 돈 받은 정치인의 이름을 털어놓고 있다. 대질신문 과정에서 정치인들을 꼼짝 못하게 몰아붙인다고 한다. 박 회장은 자신이 뿌린 검은돈의 흔적을 모두 기록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권력관리의 마지막 기술인지도 모른다.

이 땅의 많은 권력자들은 박 회장에게 농락당한 셈이다. 박 회장은 우리 시대 권력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권력자들이 바뀌지 않는 한 ‘제2의 박연차’ ‘제3의 정태수’는 언제든지 다시 등장할 것이다.

오병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