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집시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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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91년 1월 독일에선 나치 친위대원이었던 한 남자가 제2차 세계대전중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집시 3명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재판 당시 걸프전이 진행중이어서 일반의 관심은 별로 끌지 못했지만 나치의 집시 절멸 (絶滅) 정책에 대한 첫 심판이란 점에서 의미있는 재판이었다.

나치가 유대인 6백만명을 집단학살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나치가 집시 40만명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도 집시는 유대인과 같은 재력과 결속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비극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없었다.

집시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지만 인도 북부에 살았던 코카서스인종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들은 11세기부터 서쪽으로 이동, 서아시아.발칸반도를 거쳐 유럽에 들어갔다.

영어로 집시, 프랑스어로 지탄이라고 부르는 것은 집시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집시들 스스로는 롬.로마니라고 부른다.

현재 집시는 전세계적으로 약 1천2백만명이 살고 있는데 8백만명이 유럽에 거주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유럽이 밀집지역이다.

옛유고.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에 각각 50만~1백만명의 집시가 살고 있다.

80년대말 동유럽 공산체제가 붕괴하고 공산주의 대신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집시는 민족주의 세력의 공격을 받고 서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집시가 1차 대상으로 삼은 나라는 독일이었다.

독일 기본법은 망명자는 누구나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92년 이후 독일 정부가 망명의 법적 요건을 강화하고 극우파 테러가 심해지자 멀리 캐나다로 방향을 돌렸다.

캐나다마저 몰려드는 집시를 막기 위해 입국 요건을 강화하자 이제 영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달 중순부터 영국 켄트주 항구도시 도버에는 집시 비상이 걸렸다.

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인 이들 집시는 현재 1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또 바다 건너 프랑스 칼레에 3천명이 대기중이라는 소식이다.

켄트주는 이들을 위해 1백만파운드의 예산을 긴급 배정하는 등 비상대책을 마련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다.

세계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유랑민족 집시. 이들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국제사회는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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