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맥경화’ 막아라 … 미국 정부 직접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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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수급에 당해낼 재간은 없다. 제아무리 상품이 좋아도 공급이 넘치면 가격은 떨어지고, 거꾸로 수요가 넘치면 품질에 관계없이 가격은 오른다. 지금 미국 달러화가 기로에 서 있다. 달러 공급이 넘쳐 달러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18일(현지시간) 향후 6개월간 미 국채 3000억 달러어치를 직접 매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 정부는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한 돈을 경기 부양에 사용할 계획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화 사태 이후 FRB가 돈을 아무리 풀어도 민간 금융회사는 돈을 움켜쥔 채 시중에 공급하지 않아 ‘돈맥경화’가 심화됐다.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한 미 정부와 FRB가 중간에서 거래를 중개했던 민간 금융회사를 빼고 직거래에 나선 것이다. 미 정부가 직접 시중에 돈을 뿌리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민간 금융회사 없이도 달러가 시중에 배포될 수 있게 된다. 이는 달러 공급 증가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달러화는 주요 통화에 대해 일제히 약세로 돌아섰다.

19일 원화가치는 한 달여 만에 달러당 1300원대로 복귀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25.5원(1.86%) 오른 달러당 1396원에 거래를 마쳤다. 원화가치가 1300원대를 기록한 것은 지난달 11일(1393.5원) 이후 처음이다. 기업은행 자금운용부 김성순(외환딜러) 차장은 “외국인들이 달러를 팔겠다는 주문을 많이 냈다”며 “해외 시장에서 달러 가치가 하락한 것도 국내 시장에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미 국채 발행이 증가할 때 달러 가치가 약세를 보이는 현상은 이미 경험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미 국채 발행이 급증하자 세계 주요 통화에 대한 달러의 평균가치는 추락했다. 또 2006년부터 미 국채 발행이 가파르게 늘어나자 달러 평균가치가 또다시 급락했다. 다만 지난해 9월 중순 미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세계 금융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는 바람에 달러화가 강세로 돌아섰다. <그래프 참조>

KB투자증권 주이환 연구위원은 “그간 세계적인 신용경색으로 인해 달러에 내포된 미국 자체의 문제가 간과된 채 달러화가 강세를 유지했다”며 “그러나 이번 FRB의 미 국채 매입 소식은 미국 내부의 문제를 새삼 부각시켜 달러 약세를 촉발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달러 직접 공급의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만만찮다.

한국투자증권 김학균 투자전략팀장은 “FRB의 이번 조치는 분명히 달러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압력을 가할 수 있지만 제한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 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예전에 세계 금융시장에 달러를 공급했던 기관은 미 정부와 FRB가 아닌 미국의 민간 금융회사였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며 “이들 민간 금융회사의 기능이 회복돼야 달러 가치가 본격적으로 떨어지게 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한편 우리 정부가 대규모 국채 발행을 통해 27조~29조원 규모에 이르는 ‘수퍼 추경’을 편성할 계획이 국내 채권시장에 미칠 영향을 전문가들이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자칫하면 공급 과잉으로 채권 가격이 폭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성태 한은 총재는 “국채 발행이 많이 돼서 채권시장 등 다른 금융거래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때 거시경제 상황에 적합한 금융활동이 이뤄지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한은이 상황에 따라서는 국채를 사들여 시장의 충격을 완화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희성·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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