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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이전 신화 벗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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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신화는 현실보다 훨씬 감동적이다. 영화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천재적 상상력을 잘라버렸다. 그래서 웅대한 스케일만큼 가슴을 울리지 않는다. 호메로스는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의 도주가 트로이전쟁의 원인이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거대한 그리스 제국을 건설하려는 미케네 왕 아가멤논의 야망을 더 부각한다. 호메로스의 이야기는 사라예보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설명보다 더 환상적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따라 움직이는 신화는 현실보다 더 명쾌하고 흥미롭다. 하지만 정치는 현실이다. 명분과 다른 목적이 깔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정치는 꺼풀을 벗길수록 혐오감이 심해진다.

지방과 수도의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를 이전해야 한다고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정치를 '소용돌이(vortex)'라고 표현했다. 모든 것이 서울로 몰린다는 뜻이다. 수도권 인구만 42.6%에 이른다. 그러니 수도를 옮기지 않고는 서울병을 고칠 수 없다는 말도 무리가 아니다. 환경.교통.주택….

그러나 수도 이전으로 모든 게 풀릴지, 그 대가로 치를 부작용은 감당할 만한지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린다. 비용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안일까. 수도 이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신화는 아닐까.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은 비용 때문에 포기했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단은 그 원인을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에 휘둘리는 것이 어디 일본뿐일까.

흔히 모범적인 행정수도의 예로 미국 워싱턴을 든다. 하지만 워싱턴이야말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부채를 인수하도록 추진했다. 당시 13개 주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고 부자였던 버지니아가 반대했다. 다른 주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왜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해밀턴은 버지니아의 포토맥 강변에 수도 워싱턴을 건설하는 것으로 버지니아의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을 설득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수도 이전을 '일종의 빅딜'이라고 했다. 수도권 규제 완화와 맞바꾼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 이전이 정치인끼리 이해관계를 나눠 가질 문제는 아니다. 정부는 이전 비용을 45조6000억원이라고 추산했지만 100조원이 넘을 것이라는 전문가들도 있다. 관청을 드나들지 않고는 사업 하기 어려운 한국에서 기업들마저 몰려갈 가능성은 충분하다. 예산이 아니라도 국부의 소모다. 미군기지가 한강 이남으로 옮겨가고 수도마저 이전할 때 수도권.강원지역 주민이 느낄 불안감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노 대통령은 과거의 천도를 "구세력의 뿌리를 떠나 새 세력이 터를 잡는 한 시대 지배세력의 변화"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17대 총선과 맞물린 입지 선정, 18대 대선을 직전에 둔 착공…. 정치 일정에 맞춰진 이전 계획은 정략이란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이를 견제할 야당마저 표를 좇아 찬성과 반대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경주 1000년, 서울 600년이다. 수도 이전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천년대계다. 그런데도 정치적 공방만 무성하다. 수도를 옮겨 어떤 이득이 있는지, 무엇을 잃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국민이 대부분이다. 3부가 모두 이전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는 사람도 많다. 여기에는 언론도 책임이 있다. 서두를 일이 아니다. 신화를 걷어낸 뒤 진지하게 국민적 합의부터 이끌어내야 할 이유다.

김진국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