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에 직접 돈 뿌리기… 문제는 소비 늘리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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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호 04면

일본 북부 아오모리현 니시메야의 마을 주민센터에서 한 여성이 5일 정액급부금이라고 적힌 현금봉투를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짓고 있다. 봉투 안에는 1만2000엔이 들어 있다. 일본 정부는 5일부터 전 국민에게 1만2000엔(노인·청소년은 2만 엔)씩 현금을 나눠 주고 있다. 니시메야 AP=연합뉴스

이르면 5월 새로운 형태의 돈이 등장한다. 정부가 저소득층에 나눠 주기로 한 쿠폰이 그것이다. 정부는 12일 생계지원금이나 희망근로 임금, 대출 등의 형태로 앞으로 6개월간 모두 6조3733억원을 쏟아 붓는 민생대책을 내놓았다. 이 중 공공근로 임금으로 지급되는 2조원의 절반인 1조원이 소액 쿠폰으로 지급될 예정이다. 가구당 월소득이 최저생계비의 120%(4인 가구 기준 159만1931원)에 못 미치고 재산이 1억3500만원(대도시 기준) 이하인 40만 가구가 공공근로 대상이다. 가구당 한 명이 최대 6개월까지 일하면 매달 83만원을 현금과 쿠폰으로 절반씩 나눠 받는다.

6개월간 6조원, 쿠폰경제 시대가 온다

세계 각국 정부가 국민에게 직접 돈을 뿌리고 있다. 일본은 5일부터 전 국민에게 1인당 1만2000엔(약 18만원)의 현금을 나눠 주고 있다. 1999년에도 3500만 명의 저소득층에 2만 엔씩을 준 적이 있다. 태국은 이달 말 저소득 근로자 900만 명에게 2000바트(약 8만3000원)씩 줄 계획이다. 대만은 올 1월 전 국민에게 1인당 3600대만달러(약 15만5000원)어치의 상품권을 나눠 줬다. 중국은 항저우·청두·난징 등 지방정부 차원에서 소비쿠폰을 발행하고 있다. 호주는 지난해 저소득층에 가구별로 최대 950호주달러(약 93만원)를 지원했다.

대만에서 올 1월 춘제(설날) 연휴에 맞춰 전 국민에게 나눠준 소비쿠폰(상품권)의 모습.

독일은 전 국민 8200만 명에게 500유로(약 96만원)짜리 상품권을 나눠 주는 방안을 기민·사민당 연립정권이 논의 중이다. 미국에서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 컬럼비아대 교수가 “5000억 달러 규모의 소비쿠폰을 발행해 내수를 진작하자”고 제안하는 등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고려대 이장혁(경영학) 교수는 “국가가 가계 소비를 직접 뒷받침하는 ‘쿠폰 경제’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며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얼마를, 어떻게 지원하느냐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역할 바뀐 정부·가계
정부가 가계에 직접 돈을 주는 것은 이례적이다. 평상시라면 가계는 세금을 내고, 정부는 이 돈으로 국방·사회간접자본(SOC) 등 공익을 위해 써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롯된 글로벌 경제위기는 이런 원론을 바꿔 놨다. 사정이 워낙 빨리 악화되다 보니 아랫목에 군불을 지피고 윗목이 따뜻해지길 기다릴 여유가 없어졌다. 금융과 기업 부실의 여파로 줄어든 소비가 먼저 살아나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효라는 생각이 확산됐다.

전통적인 정책수단을 쓸 여지가 사라진 점도 큰 이유다. 미국과 일본이 사실상 제로금리로 들어섰고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았지만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돈이 돌지 않고 있다. 은행에 돈을 퍼줘도 기업과 가계로 가지 않고 은행 금고 속을 맴돈다. 유동성 함정이다. 정부-은행-기업-가계 순서로, 피라미드 위로부터 돈을 집어넣는 방식의 한계다. 피라미드 아래인 가계에 직접 돈을 뿌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범식 수석연구원은 “정책 수단의 약발이 안 먹히자 세계 각국이 무제한 돈을 푸는 ‘양적 팽창’으로 선회했다”며 “뿌린 돈이 빨리 돌게 하려면 소비 주체인 가계를 직접 지원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쿠폰 경제는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의 태두 중 하나인 밀턴 프리드먼은 ‘항상소득가설’을 통해 “소비자들은 항구적으로 소비가 늘어난다고 믿을 경우에만 소비를 늘린다”고 주장했다. 일시적으로 예상 밖의 현금을 손에 쥐면 쓰기보다는 빚을 갚거나 저축하기 쉽다는 것이다. 과거 일본이 그랬다. 일부 경제학자가 ‘쿠폰 무용론’을 제기하며 여전히 규제완화나 감세 등의 처방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하지만 케인지언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반론이 점차 세를 얻어가고 있다. 이들은 ‘인간이 합리적’이란 가정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부시 행정부 당시 이뤄졌던 세금 환급 이후 소비가 늘어났고, 대만에서 상품권을 지급한 뒤 백화점 등의 소비가 10%가량 늘어났다는 점 등도 이들을 뒷받침한다.

현금이냐 쿠폰이냐
쿠폰경제는 현대 자본주의가 가보지 않았던 길이다. 냉전 시절 서구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배급표는 비효율성의 상징이었다. 지금처럼 대규모로, 또 장기간 쿠폰이 뿌려질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기왕 나눠 주기로 한 돈을 현금으로 줄지, 쿠폰으로 줄지에 대해 논의가 분분한 이유다. 현금 반, 쿠폰 반을 선택한 ‘민생안정대책’에도 이런 고민의 흔적이 서려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1일 보고서를 통해 “국가가 돈을 뿌리려면 쿠폰보다는 현금이 낫다”고 제안했다. 10년 전 일본에서 쿠폰을 나눠 줬더니 불법으로 할인(깡)을 해 소비진작 효과가 나지 않았던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쿠폰을 만들어 배포하는 비용과 구입 가능한 상품과 점포를 선정해 회수하는 비용이 너무 커 ‘보급 악몽(logistical nightmare)’이란 말까지 나왔다. 쿠폰 1만원이 소비를 진작하는 효과도 1000원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됐다. 어차피 사용할 현금 대신 쿠폰을 쓰는 일종의 구축 효과 때문이었다. 기한이 가까울수록 쿠폰의 가치가 떨어지는 단점도 있다.

행정절차가 지연되며 쿠폰을 현금으로 바꾸기 어렵게 된 일본 상점들은 액면가보다 훨씬 낮게 계산한 쿠폰으로 종업원 임금을 주기도 했다. 연구소는 또 현금을 줘도 여러 차례에 나눠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돈을 쥐여주면 빚을 갚거나 저축으로 흘러 들어가는 비율이 커진다는 것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현금과 쿠폰의 장단점을 뒤집어 보자는 것이다. 쿠폰은 저축이나 빚 갚기에 쓰이기 어려워 소비 진작 효과가 확실하다. 제작 및 유통 회수 비용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지만 직불 카드 등과 같은 전자바우처를 도입해 크게 줄일 수 있다. 불필요한 사람이 받을 가능성도 현금 지급 때보다 작아진다. 서류상 지원대상이지만 음성적인 소득이 많은 사람이라면 쿠폰을 수령하고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하는 시간과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한남대 정상은(경제학) 교수는 “중국의 지방정부들이 가전제품을 살 때 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쿠폰을 줬더니 소비자는 싸게 살 수 있어 좋아하고 관련 산업은 현금을 확보할 수 있어 시름을 덜었다”며 “쿠폰은 지원하고 싶은 산업을 고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현금 지급도 한꺼번에 하는 게 나눠 주는 것보다 배분비용이 줄어드는 측면이 있다.

어느 계층까지 줘야 하나 고민
또 다른 쟁점은 누구에게 줄 것이냐의 문제다. 생계지원과 소비진작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저소득층에 지원을 집중하면 이들의 생활 안정에 도움이 되지만 소비진작 효과는 크지 않다. 만성 적자 상태인 이들이 기존 소비를 쿠폰으로 대신하고 현금은 빚을 갚거나 저축하는 데 쓸 가능성이 높다. 이번 대책의 주 수혜층인 소득 1분위(하위 20%) 계층은 현재 100만원을 벌어 144만원을 쓰고 있다. 가계 수지가 흑자이면서도 소비성향이 큰 2분위와 3분위까지로 지원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이래서 나온다. 청와대도 마지막까지 전 국민에게 돈을 나눠 주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원 조달도 큰 걱정거리다. 정부의 이번 정책엔 6개월간 6조원이 넘게 든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몇 년간 끌고 가기는 재원이 부족하다. 세금을 더 걷기 어려운 상황에서 남는 방법은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국채 발행뿐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런 점을 감안해 근로소득세 등 원천징수세를 감액하는 세금 환급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성균관대 안종범(경제학) 교수는 연 24조원에 이르는 국민연금의 불입을 일시 정지하자고 했다. “근로소득자는 연봉의 4.5%, 자영업자는 9%의 소득을 즉각 늘릴 수 있어 소비진작에 효과가 클 것”이라는 설명이다.

국민의 마음도 정책 선택에서 고려할 변수다. 어떤 방식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장 많이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장혁 교수는 “쿠폰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부가 뒤에 버티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신호의 역할을 해야 한다”며 “쌀 등 기초 생필품 구입을 지원하면 비용에 비해 훨씬 큰 심리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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