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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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나는 평상시처럼 바에 앉지 않고 홀의 가장 구석진 테이블 앞으로 갔다.

그리고 이예린은 벽을 향해 앉게 하고 나는 벽을 등지고 앉았다.

낯선 공간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가시권이 좁은 방향을 권하는게 일종의 예의라는 생각, 그리고 정마담의 쓸데없는 눈길을 피하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세상만사 온갖 것에 시시콜콜한 관심을 나타내는 그녀의 눈빛에는 언어 이상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서 이예린처럼 젊은세대들은 자칫 오해를 하기 십상 일 터였다.

아니 말을 바꾸면, 그것은 이예린과의 동행으로 내가 이미 정마담의 눈빛을 의식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피디가 아니라 여자,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는 은밀한 심사.

"제가 오늘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작은 맥주병을 들어 건배를 제안하며 이예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스냐 노냐, 그거 말이요?"

"노는 없어요. 제게 필요한 대답은 오직 예스뿐이에요. 어떤 인내심을 발휘해서라도 반드시 대답을 듣고야 말겠어요. "

오피스텔 커피숍에서와 달리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이예린 피디의 의지 때문에 맥주가 얼어버리겠네. 지금 필요한 건 얼리는 게 아니라 녹이는 거 아뇨?"

"앗!정말 그렇군요. 그럼 일단 드세요. "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맥주병을 부딪쳤다.

"그런데… 아직 사랑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말은 정말이요?"

"네. "

문득 의표를 찔린 사람처럼 그녀는 또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우스꽝스런 질문 같지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아뇨. 아직 이 선생님 같은 분을 못 만나서요. "

자신의 경직된 표정을 의식한 때문인가,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건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일 거요. 그런 말은 유머가 아니라 욕이니까 참고할 것. "

"아뇨. 이건 진심이에요. 자신의 첫 사랑을 이렇게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게 누구이든 사랑에 빠졌을 거예요. 요즘 세대들에게는 그런 가슴이 없거든요. 사람도 사물의 일종으로 대하니까 정서적인 교류도 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나는 내가 속한 세대를 빙하세대라고 불러요.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정말 을씨년스럽거든요. "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실제로 한기를 느끼는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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