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도우미가 가장 필요한 여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변이 거의 없었던 올 아카데미상 수상 결과에도 예외는 있다. 바로 외국어 영화상이다. 당초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된 것은 반전(反戰) 메시지가 강렬한 이스라엘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이었다. 문제투성이 교육 현장을 생생하게 그린 프랑스 영화 ‘교실’도 또 다른 유력 후보였다. 모두 지난해 칸 영화제를 비롯, 이미 전 세계 비평가들에게 두루 큰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22일 시상식에서 이들을 제치고 상을 받은 건 일본 영화 ‘굿 바이’였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가을 개봉해 이미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으되, 국제 무대에서는 낯선 작품이다. 뜻밖의 수상 결과에 일부 언론은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AP통신은 후보에도 못 오른 다른 영화들을 거론하며 후보 선정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와 달리 일본 언론은 “일본 영화산업의 개가”라며 크게 반기고 있다.

국외자로서 이번에 놀란 건 좀 다른 이유다. 죽음을 둘러싼 이 일본 영화의 시각이 바다 건너 미국, 적어도 아카데미 심사위원단까지 통할 만큼 보편적이라는 걸 확인한 점에서다.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건 지난해 국내에서도 잠시 개봉한 덕분이다. 영화의 소재는 납관사(納棺師)라는 흔치 않은 직업이다.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관에 넣는 일, 즉 우리네 표현으로 염습을 하는 전문가다. 우리네와 달리 이런 절차는 대개 집안에서 치러진다.

첫 장면부터 눈길을 끄는 건 납관사가 보여주는 솜씨다. 혹 죽은 이의 맨몸이 잠시라도 드러나지 않도록 손을 놀리는 방식이 단연 전문가답다. 특히 이 영화의 납관사는 직업적 기술 이상의 정성을 발휘한다. 죽은 이가 부모의 속만 썩이던 자식이든, 자식의 원망을 사던 부모든 이를 눈치챌 때마다 섬세한 배려를 더한다. 지켜보는 이 없는 외롭고 험한 죽음도 마찬가지다. 한결같은 예의를 갖추려 한다.

덕분에 큰 위로를 받는 건 지켜보는 이들이다. 영화 속 납관사의 활약은 죽은 이를 보내는 비통함을 달래준다. 때로는 남은 가족들 사이의 갈등마저 어루만져 준다. 나라와 문화는 달라도, 살고 죽는 건 공통이다. 생사의 경계에서 위로와 배려가 절실한 건 한가지다. 꽤나 일본적인 풍경임에도, 이 영화가 뭉클했던 건 그래서였다.

현대인에게 웰다잉(well-dying)은 웰빙(well-being) 못지않은 큰 관심사다. 최근 국내에서는 존엄사를 둘러싼 법원의 새로운 판결이 화제가 됐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환자의 가족이 병원을 상대로 연명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법원은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병원 측이 상고 의사를 밝혀 법적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되, 회생 가능성, 환자 의사 등 존엄사의 기준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점이 주목을 받았다. 국민적 애도 속에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 역시 평소 뜻대로 연명 치료를 받지 않았다.

물론 죽음을 둘러싼 일은 무엇 하나 쉽지 않다. ‘굿 바이’의 주인공이 납관사 일을 하게 된 것도 여행사 도우미로 착각한 때문이다. 본래는 첼리스트인데, 교향악단의 해체로 실업자가 됐다. 마침 눈에 들어온 신문의 구인광고에 ‘고수입’ ‘초보 환영’에 ‘여행을 돕는 일’이라고 적혀 있다. 알고 보니 실은 생의 마지막 여행, 즉 장례를 돕는 일이다. 질겁한 청년은 엉겁결에 머리 희끗한 선배 납관사를 돕게 된다. 일을 거듭하며 청년은 점차 죽음은 물론 삶에 대한 성숙한 시선을 배워 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청년의 착각이 착각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인생을 여행에 빗댄다면, 죽음이야말로 도우미가 절실한 여행이다. 법과 제도, 상품화된 서비스, 이 모든 것의 바탕이 돼야 할 우리 사회 공통의 인식까지 모두 합쳐서 말이다. 이 영화의 일본 원제(おくりびと)는 직역하면 보내는 사람, 즉 납관사를 가리킨다. 개인적으로는 영어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출발(Departures)’이라고 붙여졌다.

이후남 중앙SUNDAY 문화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