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역지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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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판사, 아니 피고인입니다" "말을 분명히 하십시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피고인, 그러니까 판사라니까요. " 엊그제 서울지법 남부지원의 '친절 모의재판' 에 피고인으로 나온 판사들은 이처럼 말이 얽혔을지도 모른다.

판사가 졸지에 피고인이 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테니까. 높은 법대 위에서 피고인을 윽박지르는 동료판사가 밉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피고인의 입장에서 느낀 재판 진행과정은 으레 고압적이다.

이것을 부드럽게 고쳐보려고 이런 모의재판을 연 재판관들의 자세는 그래서 돋보인다.

역지사지 (易地思之) , 그러니까 나와 정반대가 되는 남의 입장에 서본다는 것은 이해와 동정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이해와 동정은 공동체적 삶의 기본이다.

그런데도 요즘의 이기주의적인 삶은 이것을 철저히 무시한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파는 사람들도 사는 사람의 입장에 서봐야 한다.

연예.오락산업의 명문 디즈니사는 매표소 간판을 '표 파는 곳' 이 아닌 '표 사는 곳' 으로 바꿨다.

어린이가 길을 물으면 앉아서 눈높이로 대답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노동법 파업사태가 혼미에 빠져들자 서로의 입장을 바꿔보라는 사회적 압력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때 고개숙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동정과 이해는 좀 다르다.

자녀가 부모의 입장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 서보고 그 처지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국가대 국가간의 관계는 더욱 삭막하다.

전면적인 경제전쟁, 먹느냐 먹히느냐의 국익 싸움등과 같은 살벌한 용어가 예사롭게 쓰인다.

2차대전의 최대 피해자인 폴란드가 독일과 교과서 공동연구에 합의했다는 최신 뉴스는 그래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런 눈으로 요즘 정치판을 보면 남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전투구 (泥田鬪狗) 로 변하고 있다.

색깔론.병역론등으로 서로를 무한정 헐뜯고 있다.

정치인들은 서로의 입장을 바꿔 보기도 하고, 민망한 얼굴을 짓는 국민의 입장에 서보기도 해야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모르는 것을 탓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인간관계나 국가관계나 모든 관계가 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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