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값 심리적 저항선 무너져 … “더 떨어질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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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동안 잠잠했던 환율 변수가 다시 금융시장을 짓누르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을 팔자 원화 가치가 하락하고, 이에 놀란 국내 투자자도 주식을 팔면서 원화 가치와 주가가 함께 떨어지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원화 가치가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고 진단했던 외환시장 전문가들도 20일 원화 가치가 달러당 1500원대로 하락하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외환 당국도 시장을 안정시킬 만한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다.

◆고개 든 금융시장 불안=우리은행 권우현 외환딜러는 “심리적 지지선이었던 달러당 1500원 선이 무너졌기 때문에 원화 가치의 추가 하락 가능성이 있다”며 “지난해 11월 25일의 직전 최저치(1525원)가 깨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산은경제연구소 박용하 구미경제팀장은 “달러를 사려는 수요가 워낙 강해 단기적으로 원화 가치는 1550원까지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원화 가치의 추가 하락을 전망하는 전문가가 많은 것은 국내 외환시장에 악재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의 금융위기가 지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동유럽 국가의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이 커지면서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 LIG투자증권 유신익 연구원은 “국내 금융회사가 동유럽권에 투자한 규모는 크지 않다”며 “그러나 동유럽 채권이 많은 서유럽 은행이 타격을 받으면 국제 금융시장이 다시 한 번 소용돌이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동유럽 위기가 서유럽→아시아로 빠르게 파급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1월 28일부터 9거래일 연속 순매수를 하던 외국인들이 10일 이후 9거래일 연속 순매도로 돌아선 것도 이 같은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국내 시중은행의 신용등급 하락 ▶북한의 미사일 위협 ▶우리은행의 외화 후순위채 중도 상환 포기 등의 요인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원화 가치가 약세를 거듭하자 주식시장도 곧바로 영향을 받고 있다. 삼성증권 오현석 파트장은 “기술적으로는 코스피지수 1000선이 저점이지만 대외 변수에 따라 주가가 더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화증권 윤지호 수석연구위원은 “올 들어 코스피지수의 반등이 컸던 만큼 하락폭도 클 수 있다”며 “글로벌 수요 감소로 당분간 기업 실적의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당국 대책은=기획재정부 신제윤 국제업무관리관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외환시장 불안에 대처할 준비는 돼 있다”며 “다만 단기간에 원화 가치가 급락했기 때문에 추이를 지켜볼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외환보유액은 1월 말 현재 2017억4000만 달러로 여유가 있지만 2000억 달러 이하로 떨어질 경우 심리적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가을 하루 50억 달러씩 달러를 내다팔던 외환 당국의 시장 개입 강도는 최근 눈에 띄게 약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이달 들어 당국의 개입이 확인된 것은 이틀뿐이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며 “원화 가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진 데는 당국의 개입이 약한 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은행의 자본확충과 기업 구조조정을 통해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 이외엔 외환시장에 대한 대응 방안이 마땅치 않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은행이 정부의 보증을 활용해서라도 외화 유동성을 늘리면 시장 불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현·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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