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아세안 국가와 협력 강화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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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천하대세를 보는 눈이 어두워지면 나라 사정은 물론 주위 형편이 힘들어지고 국가의 진로가 험난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동북아 중심 국가의 시민을 자처하고 있지만 정작 이웃인 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우둔함이 체질화된 듯하다. 며칠 전 싱가포르의 고촉통(吳作棟) 총리는 불평과 경고를 겸한 듯한 어조로 우리의 무관심을 심도있게 지적하였다. 결코 가볍게 넘겨버릴 수 없는 사안이다.

*** 싱가포르 총리 비판 새겨들어야

첫째로 북한 핵문제를 능가하는 큰 위험을 안고 있는 대만해협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데 대해 한국이나 일본의 국민이 별다른 우려를 표시하지 않는 것이 매우 의아스럽다는 것이다. 대만의 민주정치가 독립으로 향한 국민정서에 밀려 헌법 개정이라는 수순을 밟게 되면 중국은 경제성장의 적신호를 각오하고라도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올 것이 분명하다. 과연 대만의 민주적 자결주의 원칙과 중국의 통합국가에 대한 정통성의 원칙이 군사적 충돌을 피해가며 공존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한 충돌을 예방하는 노력은 두 당사자나 미국뿐 아니라 아시아의 이웃나라들, 특히 한국과 일본이 좀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말라카해협의 해로 안전문제에 대해서도 한국과 같은 나라가 남의 일처럼 무관심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민생활을 지탱해주는 중동 석유의 안정적 공급은 물론 수출입의 가장 중요한 수송로인 말라카해협과 싱가포르해협 등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해적으로 인한 위험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해로 안전문제에 대해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세 당사국이나 미국에 모두 일임하는 듯한 우리의 자세가 타당한지는 재고되어야만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도 국제적인 공동대처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임이 마땅하다.

셋째로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의 여러 나라가 이슬람교 원리주의 및 테러리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겪고 있는 시련에 대해서도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이웃들의 좀더 적극적인 이해와 성원을 바라고 있다. 예컨대 말레이시아에서 바다위 총리가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로 원리주의자 세력을 제압한 데 대해 주목해야 하며, 탁신 태국 총리가 남부 무슬림 지역의 테러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민다나오섬의 무슬림 반군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진력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시해야만 한다. 특히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가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하는 근대국가의 틀을 다지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음을 인정하고 7월 5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에 대해서도 범아시아적인 관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난해 우리는 아세안 국가들에 200억달러를 초과해 수출함으로써 아세안은 우리에게 셋째로 큰 수출대상 지역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뒤지지 않으려고 싱가포르를 비롯한 아세안 국가들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제관계 증대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아세안 국가들의 관심은 장기적 안보전략 차원에서 한국과의 협조 가능성이다. 특히 중국과 일본이란 두 아시아 강대국의 정치적.경제적 압력이 서서히 가중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는 아세안의 지도자들은 이 두 세력 사이에서 어떤 외교정책에 의해 지역안보와 국가적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벌써부터 고심하고 있다.

*** 이웃 나라들, 한국의 역할 기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수천년을 살아오며 갖은 시련을 다 겪은 한국인의 지혜를 빌릴 뿐 아니라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과의 협조관계를 통해 아시아 평화를 보장하는 세력균형 체제를 수립하고 싶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장 지역안보의 근간이 되는 미국과 중국 간의 원만한 관계유지에도 한국과 아세안 국가들이 공동으로 협력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전망이다.

이처럼 아시아의 이웃들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기대를 갖고 있으나 한편 우리의 상대적 무관심에 대해 의아해하는 점도 없지 않다. 말로만 동북아 중심 국가를 외치지 말고 마음과 생각을 진지하게 이웃으로 돌려야 할 때다. 국제사회에서도 외톨이가 되는 것은 생존의 기초가 흔들릴 수 있음을 새삼 기억해야겠다.

이홍구 前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