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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봄을 나누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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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우리는 다시 새봄의 초입에 섰다.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시인 정지용은 ‘이른 봄 아침’에서 봄이 오는 풍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봄ㅅ바람이 허리띄처럼 휘이 감돌아서서/ 사알랑 사알랑 날러 오노니/ 새새끼도 포르르 포르르 불려 왔구나.” 한결 유순해진 바람결에는 몸 가볍게 살랑살랑 걷는 여인의 모습이 겹쳐 있고, 새 생명은 다시 태어나 날개를 펴고 첫 비행을 한다.

입춘에 입춘첩을 새로 지어 대문에 붙인 집도 눈에 띈다. 입춘첩에는 좋은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 입춘이 되니 크게 길하고 밝은 기운과 경사를 듬뿍 받으시라는 뜻의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입춘첩도 좋지만, 내가 각별하게 좋아하는 입춘첩은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라는 글귀다. 산처럼 건강하고, 바다처럼 넉넉해지시라니 이 뜻은 얼마나 큼직하고 좋은가.

입춘이나 정월 대보름 무렵에 행하던 풍속 가운데에는 적선(積善)의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착한 일을 적어도 한 가지 쌓았는데, 개울에 징검돌을 놓아 사람들이 개울을 건너가기 쉽게 하거나 쌀독이 빈 집에 한 되의 쌀을 몰래 넣어두는 일로 적선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봄이 시작되는 이즈음에는 나의 다복을 비는 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형편을 함께 돌보는 일을 했던 셈이다. 옆을 돌보는 미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누항(陋巷)의 인심을 바라보자면 개인적 소망이 이뤄지길 바라는 정도는 더 절실해졌지만, 적선의 풍속에 대한 관심은 덜해진 것 아닌가 싶어 적잖이 아쉽기도 하다.

입춘에 나는 두 분의 스님으로부터 귀한 말씀을 들었다. 정토수련원 원장 유수 스님은 당신의 출가 인연에 대해 들려주셨다. 은사 스님인 법륜 스님으로부터 “빗자루처럼, 걸레처럼 살라”는 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아 출가를 결심했다고 했다. 빗자루처럼, 걸레처럼 낮고 누추한 자리로 가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생명을 위해 봉사하며 살라는 말씀을 당신의 출가 인연에 빗대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라는 책을 펴낸 원철 스님의 덕담도 인상적이었다. 옛날 선사들은 “별일 없으신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향 피우고 발우 씻으며 지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늘 하던 대로 기도할 때 기도하고 밥 먹을 때 밥 먹으며 산다는 말씀이니, 신통이니 묘용이니 하는 것도 일상 속에 있는 만큼 평상심으로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져 모두가 위기 속에 있고, 주머니가 얇아지면서 인심이 쌀쌀하고 거칠어지는 것을 본다. 이럴 때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나를 대하듯 주변 사람을 대하는 싹싹하고 부드러운 마음, 그리고 나 스스로는 평소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계곡이 아무리 깊어도 봄이 되면 그곳에도 봄꽃은 핀다. 우리가 지금 가장 어둡고 추운 계곡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봄의 기운은 어김없이 와서 번진다. 우리는 이미 봄이 오고 있는 길목에 나란히 들어섰다. 봄을 함께 나눌 일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신춘(新春)의 새잎이 돋게 하고 새들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게 하자.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