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뭣으로 새세기 맞으려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9세기말과 20세기말 나라사정을 비교해 보면 몇가지 유사점이 발견된다.

첫째로 개화.보수의 대립이 빚어낸 국론의 양분현상과 이념대립의 산물인 국토양단현상이 비슷하다.그때나 이제나 내부요인 때문에 민족의 역량이 유실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둘째는 한반도가 외세의 각축장이 돼 있다는 점이다.당시는 청(淸).일(日).러시아가 한반도를 먹이로 삼아 전쟁을 치렀고,지금은 주변 4국이 경쟁하는 와중에 특히 거대미국과 대중화권(大中華圈)의 패권주의가 맞부닥치는 접점지대로 돼있다.덕분에(?) 그 틈새에서 자주국방.자주외교가 흔들리고 있다.

셋째는 열악한 조건을 헤쳐나갈 실사구시(實事求是)적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어찌 보면 19세기말의 황제 칭호나 연호의 사용-대한제국의 외화내빈(外華內貧)적인 행태와 오늘날의 세계화 구호,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따위는 태생적으로 닮은꼴이 아닌가.그때나 지금이나 상대평가의 잣대로 보면 속빈 강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19세기말에 20세기말을 포개놓고 보면 왠지 어렴풋한 그 밑그림은 너무나 닮아 보인다.그렇다면 여러모로 불민(不敏)했던 대한제국이 20세기의 민족적 비운을 불러들였는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21세기를 예고하고 있는 것일까.역사의 반복성은 그냥 방정맞은 생각일 뿐인가. 지금 북한은 동반자살형의 전쟁을 꿈꾸고 있다.중국은 연평균 12%라는 고도성장과 홍콩 회복을 계기로'대중화'의 행군을 계속할 것이다.일본은 세계 1위의 무기수입이 말해주듯 군국(軍國) 일본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 한다.반면 미국은'대한민국 일변도'에서'한반도 전체'를 염두에 두는 시각변화를 보이고 있다.

19세기말이 그랬듯이 20세기말 역시'운명의 시기'가 아닌가 느껴진다.그런데 당사자인 우리는 지금 어떤 21세기를 그리고 있는가.우리는 무엇으로 새 세기를 맞으려 하는가.

우리의 국가경쟁력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평가대로라면 한국의 순위는 지난해 27위에서 올해는 30위로 처졌고 그나마 4룡중 꼴찌요,태국보다 낮다고 한다.

말인즉 OECD 회원국이 됐고 유엔 안보리의 비상임이사국이며 GNP,수출입 규모 등에서 상위 반열에 올라 있다.그러나 지금의 실적이 반드시 내일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지금의 실적이 내일의 경쟁력을 위한 씨앗으로 다시 파종될 때라야 비로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다.이는 불변의 역사법칙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내일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성장을 가능케 했던 강인한 정신과 저임금,높은 교육열은 이제 더이상 동력이 되지 못한다.하면 된다던 정신력은 과소비와 물신(物神)풍조로 이미 퇴색됐고 저임(低賃)은 사라졌으며 높은 교육열이라야 창의보다 묵은 지식의 복제에 치중돼 있다.

대신 미래를 염려하는 논의라도 풍성한가 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언론은 무슨 때나 돼야 양념치레로 미래를 거론할뿐 그 우수한 재능을 떼거리 정치의 뒤치다꺼리에 쏟아붓고 있다.

사회 지도층,특히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더욱 한심하다.미래라는 이름의 돋보기로 그들을 보면 어떤 자격으로 거기,그 자리에 있게 됐는지 의심스럽다.모름지기 국가를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해야만 지도그룹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인데 어쩌다 그 그룹에 끼게 된 것만으로 지도자답다고 하겠는가.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나의 일이 곧 나라일이고 내 당의 선택이 곧 국가적 선택이라고 착각하고 있는한,그리고 언론이 그런 떼거리 사고(思考)에 북치고 장구치는 한,이 운명의 시기에 우리 자신이 그리고 있는 21세기의 그림은 비록 국운이 좋다고 해도 고작 속빈 강정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필자는 비관론자가 아니다.우리의 지정학(地政學)적 이점-양 옆구리에 중.러와 미.일 같은 거대시장을 끼고 사는 유리한 점을 잘 활용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용꿈으로 가득할 것이다.그러나 역사는'잘 활용만 한다면'이란 가정법을 용납하지 않는다.고로 우리는 지금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21세기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무엇으로 새 세기를 맞으려는가.” <고흥문 前국회부의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