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람 장마나기 8계명-짜증나는 장마 "차라리 즐겨 볼까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서울 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는 옛말이 있다.

남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자신의 입장만 얘기하는 풍토를 꼬집은 이 말은, 거꾸로 그만큼 물이 귀하던 시절 비에 대한 희구가 어땠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비.그리고 장마. 매년 6월 하순부터 우리를 찾아오는 장마는 우리나라 연강수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수자원의 주공급원으로 벼농사에 없어서는 안될 천혜의 자원이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보릿고개는 없어졌지만 비가 좀 심하게만 오면 도처에서 수해가 나는 '장마고개'는 아직 우리 곁을 떠날 줄 모른다.비가 많이 와 물에 잠긴 논밭을 보며 수심이 깊어지는 농군들이나 수해로 세간이 떠내려가고 사람과 가축이 상하는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에게 장마는 지긋지긋하리라. 오죽하면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라는 속담마저 나왔을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눅눅한 옷과 무더위로 짜증만 늘어가는 도시인들에게 장마는 좋은 기억을 별로 제공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고온다습한 아시아 몬순지대에서 1년에 한달간 비 세례를 주는 조물주의 섭리를 꼼짝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우리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한 여자교수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은 이 장마철을 지혜롭게 보내는 행동지침으로 더 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한 장마예찬론자는 이렇게 말한다.“잘 마르지 않으니까 빨래 안해도 되고 먼지도 잘 안끼니까 청소 안해도 되고 옮겨다니기 불편하니까 안돌아다녀도 된다.” 게으른 자의 변명까지 갖다붙일 필요는 없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장마철도 재미를 찾으며 보낼 수 있다.

우선 오랜만에 포장마차를 한번 찾아본다.비닐 천막위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투명한 소주를 '꼬로록'소리가 나도록 소주잔에 따른다. 보통 꼼장어나 닭똥집,또는 멍게나 해삼을 시켜 먹지만 이런 날은 고소한 어묵이나 그냥 우동 한그릇만 시킨다.

두번째는 야외수영장을 찾는다.비를 맞으며 수영을 하는 재미는 안해본 사람은 모른다. 비를 맞으며 수영을 하면 살이 두배로 빠진다는 믿지못할 속설도 있다. 힘들어서 살이 빠지고 비를 맞으면 마사지가 된다나.이 이론에 따르면 특히 뱃살이 나온 사람들은 배영을 하면 좋을 듯하다. 다만 번개가 칠 것 같으면 얼른 물에서 나올 것. 세번째,분위기 있는 카페에 하루종일 앉아있기.특히 커다란 유리창에 부딪치는 비들의 외침과 속삭임에 귀기울여 본다.

서울지역을 보면 대학로 버틀러,돈암동 시티 라이트,청담동 리브 고쉬,홍대근처 한강변 노말,63빌딩 스카이바,신림동 덩크슛,남산 휘겔등은 유리창이 넓은 카페들중 하나다.돈이 좀 있으면 전망좋은 하얏트 호텔 로비를 찾는다.

네번째는 프로야구를 보며 친구들과 내기를 해보자. 무덥고 습한 장마철에는 공기저항도 크고 야구배트나 공의 탄력성이 작아 공이 멀리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따라서 일단 투수력이 좋은 팀에 거는 것이 유리하다.

투수도 강속구 투수보다는 변화구 투수가 강한 팀에 걸자.습한 날에는 공기저항이 크고 따라서 공의 회전이 심해져 변화구가 더욱 잘 먹히기 때문이다.변화구가 뛰어난 투수로는 8가지 변화구를 던진다는 해태의 조계현을 비롯,김용수(LG),박충식(삼성),박지철(롯데),진필중(OB)등을 들 수 있다. 기분전환을 위해 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다섯번째 방법. 보통 사진은 맑은 날 찍어야 잘 나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햇빛 양이 적고 피사체가 간접적으로 광선을 받는데다 명암의 차이가 적당히 나타나는 비오는 날이 오히려 분위기있고 환상적인 연출을 할 수 있다.

비가 오는날 사진배경에 안개구름이나 먹구름을 넣으면 현장감이 생긴다.30분의 1초라는 느린 촬영속도로 사진을 찍으면 빗살이 수직으로 그어진 듯한 영상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아주 흐린 날이나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에는 찍어도 잘 안나오고 비싼 카메라에 물이 들어갈 수도 있으므로 피하는게 상책. 여섯번째.눅눅한 날일수록 건조한 느낌을 유지해야 상쾌하다. 일단 할인매장에 가서 물먹는 하마를 대량 구입한다.뽀송뽀송한 수건이 넉넉하게 있는지도 살펴보고 돈에 여유가 있으면 큰맘 먹고 건조기도 한대 산다.날이 궂을수록 방을 따뜻하게 하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뒤 사각거리는 이불속에 누워 개운한 마음으로 만화책을 본다.

일곱번째.가뭄으로 고통받는 삶을 그린 비디오를 빌려다본다.소설이라도 좋다.예를 들어'펄벅의 대지'.아니면 대지가 이글거리는 사막이 화면 가득 나오는 영화도 괜찮다.데이비드 린 감독의'아라비아의 영웅 로렌스'등이 그런 종류. 여덟번째.어린시절로 돌아간다.남들이 뭐라하건 신경쓰지 말고 대문밖으로 나가 내리는 비를 흠뻑 맞는다.시골이라면 어릴적 놀던 기억을 되살려 흙길 가운데 지나는 사람이 살짝 빠질만한 함정을 만들고 멀리서 지켜본다.그 함정속에 뭐를 넣었더라.

정형모 기자

<사진설명>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비에 막혀 그대로 어둠이 되는 미도파앞을/비는

내리는데/서울시민들의 머리위를 비는 내리는데….(조병화'비는 내리는데'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