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으론 가난한 사람 부자 못 만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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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新稅)는 악세(惡稅)인가’.

6공 때 국세청장을 지낸 서영택(70·얼굴)씨가 조세 전문가로 보낸 30여 년의 공직생활을 되돌아보며 던진 화두다. 세금이 새로 생기는 걸 달가워할 납세자는 없다. 하지만 나라 살림을 꾸려가자면 ‘신세’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는 새 세금이 불가피하다면, 있는 듯 없는 듯한 세금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조세를 사회·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 전 청장은 이런 주장을 담아 최근 『신세는 악세인가』를 펴냈다. 회고록이자 조세사다. 현재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인 그를 지난달 30일 오후 6시 그의 사무실 부근 찻집에서 만났다. 사무실을 두고 인터뷰를 위해 굳이 외출한 그는 “내가 있으면 직원들이 퇴근을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쓴 동기에 대해 “기록으로 남기고, 자기 반성과 소회를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잘했다, 옳았다는 주장보다 아쉽다, 잘못됐다는 성찰이 많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세정 경험에 비춰 “가장 무서운 조세 저항은 시위가 아니라 ‘무저항의 저항’”이라고 말했다. 당장 드러나지는 않지만 경제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잘못된 ‘신세’의 대표로 종합부동산세를 꼽았다. “소득 재분배는 세금이 아닌 복지정책을 활용해야 한다. 세금은 부자를 가난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 순 없다.”

청장 시절인 1989년 도입된 토지초과이득세에 대해서도 “투기를 잡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지만 대가가 컸다”고 말했다. 토초세를 피하느라 새 건물이 마구잡이로 지어진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 때문에 건물들이 과잉 공급됐고, 부실 공사도 많았다. 토초세는 유휴지나 비업무용 토지에 세금을 중과하는 제도다. 그는 “투기자 명단을 공개하면서 땅 주인으로 등기된 초등학생 이름까지 공개한 것은 나의 실수”라고 고백했다. 세금의 내용만큼이나 만들고 알리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가가치세’를 성공한 신세로 꼽았다. “부가세 도입을 제안한 고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실무자들은 만날 때마다 싸웠다. 김 전 수석은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지적된 문제에 대한 보완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청와대 뜻이라고 무턱대고 새 세제를 도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는 가뜩이나 생소한 세금에 ‘부가세’란 이름을 붙여 ‘추가로 거두는 세금’이란 뜻으로 오해하게끔 한 것을 아쉬워했다. 시행 초기 인위적 물가 통제는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라고 표현했다. 서 전 청장은 “시행 전 납세자가 직접 참여하는 예행연습을 한 것은 지나친 행정편의주의였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부터 시행하는 근로장려세제(EITC)도 좋은 제도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공무원 2000명을 추가로 뽑아야 돌아가는 제도라면 효율적일 수가 없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근로자 절반이 세금을 한 푼도 안 내는 상황은 곤란하다. 소득이 있으면 100원이라도 세금을 내게 하고, 나중에 재정지출로 지원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다. 국세청장들의 잇따른 불명예 퇴진 때문이다. 그는 국세청장의 덕목으로 엄격한 자기 관리와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단호함을 꼽았다. 그는 “열심히 일한 공무원이 승진하는 풍토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88~91년 국세청장, 93년까지는 건설부 장관을 역임했다. 부가가치세·종합소득세의 신설과 집행에 관여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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