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TV 뒤집기] 욕하고도 멀쩡한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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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가 ‘패밀리가 떴다’에서 모호한 발음으로 ‘XXX좋아한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하룻밤 새 ‘X나’라는 흉측한 비속어에서 소리학자의 해석을 거쳐 ‘정말’이 되는가 싶더니 결국 ‘좀 더’로 결론 내려졌다. 인터넷을 이틀 동안 뜨겁게 달궜던 사건은 허탈하게 끝나고 괜히 입 험한 여자로 오인받았던 이효리는 억울하게 됐다. 파파라치 뺨치는 UCC의 위력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지만 말 한마디에 달린 프로의 이미지 비중을 보여 준 일이었다.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은 에피소드도 있다. 흐르는 화면 뒤로 상대 출연자에게 ‘개XX’라고 욕을 속삭인 신정환은 그걸 잡아낸 UCC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고 네티즌 수사대에 붙잡혀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도박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신정환은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더구나 상상플러스가 우리말을 바르게 쓰자는 의도의 게임을 진행하는 코너였기 때문에 그의 설화는 더욱 아이러니했다.

오락 프로에서 말이 험해지기 시작한 건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다. 존댓말을 쓰던 겉치레가 사라지고 대번에 ‘자식’이 통용어로 자리 잡았고 몇 년 전만 해도 듣기 힘들던 ‘새끼야’라는 말까지 일상화돼 오락 프로나 드라마에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 단 한 자 덧붙인 ‘개XX’ 역시 머지않아 그다지 흉측하게 들리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행한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

‘개XX’ 하면 이미 2년 전 김구라가 김경민에게 욕 시범을 보인다면서 당당히 써먹었다. 음향으로 가리긴 했지만. 또 이휘재는 정형돈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이후 김구라는 독설로 주가를 날리고, 이휘재는 제2의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김구라는 얼마 전에는 욕보다 더한 동성애자 혐오를 암시하는 개그를 날리기도 했다. 티팬티 입었다는 남자를 보았다는 말에 대뜸 “그거 홍석천 아니야?”라며 동성애자와 홍석천의 명예에 먹칠을 해댔다.

다들 그러고도 멀쩡하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여기저기서 못 모셔서 난리일 정도다. 그러니 말과 행동에 대한 고민을 그들의 프로 의식 척도로 받아들이려는 생각은 구닥다리 노땅의 센스 없음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얼굴들이 조합과 요일만을 달리하며 등장하는 각종 오락쇼를 보다 보면 그들의 사고방식과 언어생활에 중독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버라이어티쇼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청자라면 거친 언어나 유머 코드에 대한 불평은 사치에 가깝다. 마치 그들이 없으면 제대로 된 쇼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주류고 대세니까.

신정환 역시 파파라치 비슷한 인터넷 UCC에 그저 재수 없게 딱 걸려들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공식적 사과는 했지만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용어를 썼다고 해서 특별히 가해지는 제재도 없고 그렇다고 자체적으로 그에게 당분간이라도 출연을 자제시키는 방송사도 없을 것이다.

수많은 말실수를 한 그들은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주중에, 주말에 바쁘게 얼굴을 비출 것이고 이미 그들의 거친 웃음 코드와 말투에 익숙해진 우리는 그걸 보며 낄낄 댈 것이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대해 ‘프로페셔널함’을 다질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한번 더 한층 강도 높은 욕설이 쏟아지는 해프닝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언어생활은 쓸쓸히 점점 더 황폐해져 갈 것이다.

이윤정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filmpo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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