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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만종'과 '이삭줍기'의 배경 Cely GC

중앙일보

입력

아무리 그림에 관심이 없다 해도 어린 시절 동네 이발소나 중국집 벽에서라도 한 번쯤은 보았을 그림 '만종'. 멀리 교회당이 보이는 노을 지는 들녘에서 가난한 농부 부부가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고 있다. 캐다 만 감자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바구니엔 씨감자와 밭일 도구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삭줍기', 수확이 모두 끝난 밭에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가려는 남루한 행색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굽은 허리와 어깨에서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모나리자' 못지 않은 유명세와 가늠할 수 없는 몸값을 자랑하는 이 작품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은 파리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 바르비종이다.

바르비종…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어딘가 낯익은 이름일 것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낭만주의적 포장을 지우고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화폭에 담아냈던 바르비종 파! 프랑스 근대 미술의 한 획이 되었던 바르비종의 이름은 바로 이 작은 시골 마을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 중반, 당시 창궐했던 콜레라를 피해 루소와 밀레가 이 곳을 찾아왔고 투박하지만 소박한 이 자연에 매료된 그들이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 후 많은 화가들이 이 곳으로 몰려들어 바르비종 파가 탄생했다.

아직도 마을 곳곳에는 바르비종 파의 스튜디오와 아틀리에가 그대로 남아 때로는 비극적이었던, 때로는 장렬했던 화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 같은 골목, 동화 같은 갤러리에서 우린 반나절을 소진했다. 골목 끝 작은 부동산에 내걸린 매물들의 가격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을 정도로 안착하고 싶던 곳이었지만 우리에겐 갈 길이 있었다. 밀레가 그린 만종과 이삭줍기의 배경이 되었던 넓은 들판과 섬섬이 자리잡은 마을 몇 개를 더 지나면 고풍스러운 샤또를 클럽하우스로 만든 Cely GC를 만날 수 있다.

Cely GC는 예정했던 골프장이 휴장을 하는 바람에 바르비종에서 가장 가까운 골프장을 네비게이션으로 검색하여 복불복으로 찾아간 골프장이었지만 의외로 왕건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염려가 앞섰다.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걸까? 이대로 진입 해도 괜찮을까? 어디선가 백작 어르신의 하인들이 몰려와 앞을 막아서는 것은 아닐까? 다소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가진 골프장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골프장은 이렇지 않을까?’ 상상 속에 그려봤던 모습에 근접한 외관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베이지색 톤의 외벽과 회색 지붕 위로 첨탑이 솟아 있는 16세기의 고풍스러운 Cely성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 성 내부를 개조하여 호텔 객실로 운영하고 있다고. 성은 대형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자의 연초록 물 위에는 백조, 재두루미, 청동오리 등이 노닐며 더욱 아름다운 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후에 코스 매니저가 Cely GC의 명물이라며 꼭 사진을 찍으라 당부했던 검은 백조도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을 매입하여 호텔로 개조하고 주변 부지를 골프장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 1990년. 원래는 클럽하우스 시설도 모두 성 내부에 있었는데 성이 내부공사 중이라 현재는 레스토랑과 함께 별채에 피신 중이라고 했다. 고성의 내부를 구경하고 싶은 욕심에 공사가 끝나면 다시 한 번 들르겠다고 했더니 워낙 오래된 성이라 공사는 네버엔딩이란다. 게다가 여러가지 문제로 현재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라는데 1년이 훌쩍 지난 지금쯤은 제자리를 찾았을까? 프로샵 옆에 붙어 있는 레스토랑은 여름이라 야외 테라스를 넓게 사용하고 있었다. 눈 앞에는 코스 전경이 펼쳐지고 뒤로는 고성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그림 같은 프레임이 연출되는 테라스였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그 곳에서 커피 한 잔 마시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될 정도.

테라스에 대한 미련을 접고 1번 홀로 직행했다. 지구본을 연상시키는 구형의 티마크가 인상적이었다. 역대 프랑스 왕들의 사냥터로 사용되던 퐁텐블로 숲이 인접한 탓일까 골프장의 울창한 조경림도 미관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잭 니클라우스 설계팀이 디자인한 코스는 한국에서도 몇 번 경험한 바가 있어 제법 익숙했다. 파72, 전장 길이 5,874m, 전반적으로는 파크랜드 형이라지만 니클라우스 설계답게 Up-Down이 많고 벙커가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호텔과 겸영하고 있는 골프장, 특히 거리상 파리와 가깝고 퐁텐블로 성이나 바르비종 같은 관광지가 지척인 이 골프장은 현지인들보다는 국내외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마케팅 위주로 움직이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난이도는 높지 않았다. 주말이나 휴가를 맞아 이 곳을 찾은 골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만큼의 난이도, 이들을 끝까지 기분 좋게 보낼 수준의 난이도가 유지되었다. 그렇다고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다음에 다시 한 번 겨뤄보고 싶은 팽팽한 수준의 난이도가 18홀 내내 이어졌다. 특히 핸디캡 1번 홀인 494m 6번 홀(파5)은 오르막이면서 도랑과 나무 등 해저드가 중간에 도사리고 있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핸디캡 2번 홀인 15번 홀 (파5)은 562미터로 3온이 쉽지 않아 두 홀 모두 과욕을 부리다 화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성이 내려다 보이는 9번 홀과 18번 홀 전경은 다른 홀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연신 기념 사진을 찍어대느라 티샷을 망치는 폐단이 되기도 했지만…

특히 어스름할 무렵의 18홀 티잉 그라운드, 첨탑이 걸린 지평선 위에 노을이 내리고 이를 배경으로 드라이버를 짚고 서있는 골퍼의 실루엣에선 밀레의 '만종'이, 허리를 구부리고 티 위에 공을 올리고 있는 골퍼의 모습에선 '이삭줍기'가 자연스레 연출되며 골퍼는 그대로 명작 속의 주인공이 된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