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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맛과 멋, 친구가 있는 프랑스 부르고뉴 골프장

중앙일보

입력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309km 지점에 위치한 디종은 1179년부터 1477년까지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였다. 디종 중심가에는 중세의 저택과 교회가 많이 남아 당시 번영했던 공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부르고뉴… 부르고뉴… 와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낯설 지 않은 이름일 것이다. ‘와인의 여왕’이라 일컬어진다는 보르도 와인과 더불어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와인의 왕’ 부르고뉴 와인. 일찍이 나폴레옹이 애용했다는 샹베르탱과 고가 와인의 대명사 로마네 꽁띠, 전세계적으로 대중화된 보졸레 누보가 모두 부르고뉴 태생이다. 디종 시가지 한복판에는 와인의 본고장답게 포도를 밟아 으깨는 동상이 서 있었고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 교외로 나가는 길에는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또한 디종은 식도락의 고장이기도 해서 에스카르고(Escargot: 식용 달팽이)와 무타르드(Moutarde: 머스타드)로 유명하다. 연간 4000여 톤이 생산되는 부르고뉴 달팽이는 크고 맛이 좋아 프랑스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고.

프랑스에서는 갑자기 입이 즐거워졌다. 세계 정벌에 나서느라 먹고 즐기는 일에 할애할 역사가 없었던 영국에서는 척박한 음식 문화로 인해 우리의 위장이 늘 슬펐다. 아침은 숙소에서 제공하는 잉글리쉬 블랙퍼스트, 점심은 클럽하우스에서 샌드위치나 스파게티로 때우고, 그나마 활동 에너지원을 보충해야 할 저녁 식사는 현지인들에게 추천을 받아 맛있다는 식당을 찾아 다녔지만 메뉴는 늘 스테이크에 맥주였다. 물론 여행 초기에는 현지 음식들을 다양하게 경험해 보는 것이 그 곳의 문화를 속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라는 짧은 소견으로, 메뉴판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낯선 토속 음식들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한 채 배고픈 불면의 밤들을 보내야 했었다. 이런 시행착오 끝에 어느덧 우리 저녁 메뉴는 조리의 변수가 적은 단순 구이 음식과 세계가 공용하는 브랜드 맥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현란한 음식 문화와 든든한 가이드 ‘파리지엔’ 덕에 우리 입맛에 착착 붙는 프랑스 음식들을 잘도 뽑아 먹고 있었다. 부르고뉴 와인은 해외로 많이 수출하지만 이동 중에 맛이 변할 우려가 있어 자체적으로 소비하는 로컬 와인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부르고뉴 와인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결국 이런 와인들은 부르고뉴를 직접 찾아온 사람들만이 맛 볼 수 있는 특권이다. 부르고뉴 와인과 달팽이 요리로 ‘미식가의 고향’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고 있는 디종, 특권을 놓칠 리 없는 어제의 전사들이 이 곳에서 다시 뭉쳤으니 매일 밤은 향연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매일 낮에는 그 향연의 물주를 간택하기 위한 피 튀기는 전쟁이 골프장에서 벌어지곤 했다.

디종 시내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위치한 골프장, Golf Blue Green Quetigny Bourgogne. 그러나 디종 시가지의 묵직한 중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현대적 감각의 클럽하우스. Golf Blue Green은 일종의 체인형 골프장으로 프랑스에만 20개 정도의 골프장이 Blue Green 이름으로 운영중이라고. 골프장이 붐빌 것이라 예상했던 일요일 오전이었으나 의외로 코스는 한산했다. 클럽하우스 바로 옆, 천연 잔디 위에 원형으로 만들어진 대형 레인지가 이색적이었다. 홀 3~4개 정도는 들어설 법한 넓은 잔디 위에서 꼴랑 두 명의 골퍼가 사정없이 디봇을 찍어대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잊었지만 서툰 영어로 열심히 의사소통을 했던 매니저의 도움으로 곧바로 코스 앞으로 진격. 비에 대한 털끝만큼의 걱정도 없는 짱짱한 하늘 아래 펼쳐진 18홀, 파 71, 전장 길이 5,625 m의 코스는 페어웨이가 넓어 골프장 규모가 실제 보다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린 근처에서는 모두 고전을 금치 못했다. 평평한 페어웨이와는 달리 그린 주변은 울끈불끈한 근육질이었다. 게다가 얼핏 보기엔 무시해도 좋을 소규모 그린 벙커였으나 막상 빠지고 보면 시야에 가려져 있던 면적이 90%인 빙하형 벙커, 근방에 떨어진 공들은 죄다 빨아들이는 가파른 경사의 블랙 혹 벙커,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잔디 벙커 등 벙커들의 만행이 횡행했다. 더불어 그린도 삐딱선을 타기 일쑤. 눈에 보이지 않는 라이가 골퍼의 성깔을 고스란히 드러나게 만들곤했다.

그런 고로 우리의 스코어는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동남아인이 연상될 만큼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하드 트레이닝을 거쳐 프랑스에 건너온 부부의 내공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날 밤의 향연은 파리지엔의 호주머니가 털렸다. 프랑스 골프의 묘미? 혀와 눈이 즐거워지는 맛과 멋이 공존한다는 점, 그리고 죽이 맞는 골프 친구가 있다는 점이다. 동반자 한 명의 등장으로 우리의 골프는 부르고뉴 와인 향보다 더 풍요로워졌다. 역시나 골프… 평생을 함께 할 골프 친구를 갖는 것이 복 중의 복이라더니….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