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민주투쟁.단골2위 영욕 점철 - 大選 4수생 김대중의 45년 정치역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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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대중(金大中)국민회의총재는 전당대회 강행군 후 숨돌릴 틈도 없이 20일 아침부터 바쁜 일정을 가졌다.

오전6시에 일어나 김영삼(金泳三)대통령.김종필(金鍾泌)자민련총재와 축하전화 통화,MBC라디오 오전8시뉴스 인터뷰,넬슨 만델라 남아공대통령의 딸 진지 만델라 부부와 조찬,강인섭(姜仁燮)청와대정무수석의 일산집 방문등이 오전10시쯤까지 이어졌다.

곧바로 진지 만델라 부부와 국립묘지를 참배(오전11시)한 뒤 서교호텔로 가 전당대회 참관차 미국에서 온 재미(在美)후원회.한국인권문제연구소등 해외교포대표단 40여명과 오찬을 함께 했다.잠시 휴식후 오후6시30분 아태 아카데미 10기 개강식에 참석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네번째 대통령선거 도전기회를 잡은 그의 45년 정치 역정도 이렇듯 바빴다.

그는 영광과 좌절을 곱씹으며 굴곡 많은 우리 현대정치사의 음지쪽을 주로 걸어왔다.'인동초(忍冬草)''영원한 민주투사'라는 간판 뒤엔'색깔론'과'말 바꾸기 명수'라는 오명도 따라다녔다.

그는 54년 목포에서 3대 총선(민의원)에 무소속 출마,정계에 진출했다.

3,4,5대 거푸 낙선한 뒤 61년 인제 보선에서 처음 당선됐으나 5.16 군사쿠데타에 이은 국회해산으로 사흘만에 무위로 끝났다.

62년 11월 6대 의원(목포)에 당선된 뒤 활발한 활동과 투쟁력 때문에 박정희(朴正熙)정권의 총력적 박해 속에 치러진 67년 7대 총선에서 승리,중진 정치인의 반열에 서는 기회를 잡았고 71년 7대 대선에서'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후보로 도전,공화당 朴후보와 선전 끝에 95만여표 차이로 패했다.

72년 유신선포 이후 그의 운명은 삶과 죽음을 오가는 험난한 길로 선회한다.일본.미국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한민통(韓民統)을 중심으로 반정부운동을 하다 73년 8월 도쿄(東京)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현해탄에 수장될 뻔도 했다.

79년 10.26사건으로 선포된 비상계엄하에서'80년 서울의 봄'을 선도하다 구속돼 군재(軍裁)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국제여론 덕택으로 82년말 석방되면서 2년여간 미국생활을 해야했다.

85년 2월 귀국한뒤 김영삼씨와 민추협공동의장으로 반독재 투쟁에 나선 그는 87년 6.29선언과 함께 사면복권이 되자 그해 12월 두번째로 대선에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92년 세번째 대선 도전에서 역시 실패한뒤 정계 은퇴를 발표하고 영국으로 간 그는 95년 6.27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큰 승리를 거두자 은퇴를 번복했다.그리고 바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73세의 그가'50년만의 정권교체'를 외치며 자신하는 이번 대선에서 어떤 결과를 맺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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