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터갓의 레슨 편지] 2. 의지가 첫걸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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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선수들을 어릴 적부터 사냥으로 단련된 타고난 마라토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황무지에서 배를 곯으며 자랐고, 달리기라곤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우리 부족은 일부다처제였습니다. 내 아버지는 부인이 셋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남편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면서 4남1녀를 어렵게 키웠습니다.

여덟살 때 유엔 기아박멸기구가 학교 급식을 시작하면서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뛰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도 공부보다 집에서는 꿈도 못 꾸는 옥수수를 먹기 위해서였지요. 군대에 징집돼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할 때까지 21년이 걸렸어요. 늦었지만 뛰기 시작하면서 행복을 찾게 됐습니다. 뛰는 일이 반복이 되면 고통이 어느덧 즐거움으로 변한다는 게 내 경험입니다.

지난해 런던 마라톤에서 내 기록은 2시간7분59초였습니다. 2002년에 이미 2시간5분대와 6분대를 기록한 적이 있었기에 무척 실망스러웠지요. 그러나 동시에 도전의식이 강하게 솟았습니다. 풀코스 도전 다섯번째였던 그 대회에서 눈이 뜨였고, 새로운 각오가 생긴 거지요. "이번의 나쁜 기록을 반드시 세계기록으로 만회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세계기록을 내 두 다리로 바꾸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게 되자 달리기는 훨씬 쉬워졌습니다. 베를린 마라톤을 목표로 정했어요. 그리고 '세계신기록'이라는 꿈을 꾸면서 즐겁게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해냈습니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 코스를 답사하면서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프라이팬처럼 뜨거워지는 아스팔트, 그 위로 올라오는 한여름의 열기, 끝없는 언덕길, 숨을 턱턱 막는 습기…. 아테네 코스는 가장 어려운 코스라고 합니다. 특히 습기가 적은 케냐에서 자란 나와 동료는 기후 적응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올림픽에서 즐겁게 뛸 겁니다. 마라톤 강국이면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이 없는 조국 케냐를 위해, 유엔 기아박멸대사로서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무엇보다 달리기와 도전을 사랑하는 나를 위해 마라톤 평원에서의 질주를 즐길 것입니다.

한국의 러너 여러분. 달리기를 하려면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일은 좀더 잘 달리겠다는 의지가 달리기의 첫발입니다. 그러면서도 현재를 충분히 즐기며 달리세요. '내 신체 구석구석이 이렇게 조화롭게 잘 작동하고 있구나'하는 경이로움도 느껴 보세요.

오늘은 '좀더 못 달렸던 과거'와 '더 잘 달릴 수 있는 내일'을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과 마음은 여러분이 뜻한 바대로 훌륭하게 움직일 겁니다. 그렇게 자기의 몸과 마음과 달리기에 대한 사랑을 가지면 달리기는 자기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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