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실업과 임금안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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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많은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는 단체협상과 임금협상의 계절이 눈앞에 다가왔다.금년은 국가적 위기감이 어느때보다 고조돼 있고 기업의 임금지불능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며 노사협상의 법률적 토대인 노동관계법의 민감한 조항들이 대폭 수정됐다는

점에서 협상의 전반적인 여건이 과거와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노동법개정으로 민노총이 합법노동조직으로 재출발한 사실도 중대한 상황변화로 꼽을 만하다.올봄의 노사협상과정과 협상타결내용은 결국 이런 상황변화의 산물이라는 성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너무 가팔랐던 임금상승

각 기업의 노사당사자뿐만 아니라 전국민의 1차적인 관심사는 역시 임금상승폭이다.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채산성악화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부쩍 늘어날 것이 예상되는 판에 예년처럼 대부분의 노조들이 두자리수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사용자측과

힘겨루기에 나설 경우 가뜩이나 탈진상태에 빠진 기업들이 어떤 곤경에 처할 것인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기업의 경영난이 오로지 임금부담 한가지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모로 보나 우리의 임금상승이 너무 가파르게 진행되어 왔으

며 그것이 경영악화의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때마침 일본에서 진행중인 투쟁없는'춘투(春鬪)'의 소식은 우리의 산업현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만든다.도요타를 선두로 일본자동차업계는 약2주전에 모두 협상을 타결지었다.그동안의 구조조정노력과 낮은 엔화(貨)가치 덕택으로 엄청난 이

익을 올린 도요타와 혼다자동차에서는 2.8%의 임금인상합의가 이루어졌다.자동차업계의 노사협상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는 도요타의 경영진은 엔저(低)로 생긴 이익의 일부를 임금으로 내놓아야 한다는 노조의 요구에 대해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

이며 그로인한 이익은 경쟁력강화를 위한 용도에 써야 한다고 맞섰다.

최종타결된 임금인상 내용은 기본급인상 9천4백엔(약 6만7천원)과 상여금에 해당하는 일시금을 5.8개월분에서 6.1개월분으로 올린 것이 전부였다.작년 우리 자동차업계의 노사협상은 9만원 내외의 기본급인상,상여금 1백%인상,그리고

몇가지 명목의 추가지급에 합의했다.인건비부담의 크기를 나타내는 매출액대비 인건비의 비율을 보면 도요타는 7%를 조금 넘는 수준인데 비해 한국자동차 업계의 평균은 12%를 웃돈다.이같은 한.일(韓.日)간 임금추세의 대비는 자동차가 아

닌 다른 업종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시장의 냉엄한 경쟁법칙은 산업계 전반에 걸쳐 불원간 실업이냐,임금안정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해 올 것이다.최근의 가파른 실업확대 추이를 뜯어보면 거기에는 경기순환적인 성격의 실업증가에 더하여 경쟁력을 상실한 사업장의 구조전환에 따른

실업발생까지 겹쳐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우리 역시 선진국들처럼 실업문제로 시달림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우리 경제가 저성장시대로 돌입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고 노동력 사용을 절약하는 쪽으로 산업기술이 계속 바뀌고 있으며 국내외시장에서 기업들의 경쟁열기는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우리경제가 얼마 안가 고실업의 시대에 접어든다는 것을 예고해주는 것이다.실업증가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가는 임금이 얼마나 신축성을 보이느냐에 달려 있다.

勞使 합심으로 불황극복

최근 산업계 일각에서 자생적으로 번지고 있는 노사합심의 불황극복 노력은 바로 이점에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금인상의 자제를 포함한 이런 움직임이야말로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자구책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한편에는 불황의 고통을 왜 근로자만이 짊어져야 하며 경쟁력회복의 길이 임금동결 뿐이냐는 세찬 항의가 터져 나온다.충분히 이유있는 이 물음에는 정부와 사용자들이 성의있는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무엇보다 정부는 물가억제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사용자측은 경영효율화에 진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잘만 하면 우리는 노동계 한모서리의 작은 변화를 위기극복의 실마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종대〈기아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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