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돈맥경화’ 더 이상 방치 안 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한국은행이 지난 18일 은행권에서 되돌아온 41조원의 단기자금 중 13조원을 회수했다고 한다. 기업과 가계가 돈 가뭄으로 아우성을 치는 것과는 정반대다. 한은이 돈을 넘치도록 풀어도 시중에 흘러들지 않은 채 은행권만 맴돌다 역류하는 이런 ‘돈맥경화’ 현상은 그만큼 신용경색이 심각하다는 의미다. 세계 각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고민이지만, 이렇게 중간에서 꽉 막힌 돈 흐름을 뚫지 않고서는 아무리 금리를 내리고 유동성을 쏟아부어도 전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풀려면 복합적 처방이 불가피하다. 우선 은행들의 기초체력을 올려주는 게 급선무다. 내년 1월에 20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키로 함으로써 3단계 은행자본 확충 방안 중 2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무늬만의 자본 확충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기자본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후순위채 발행 등을 통해 눈가림식으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을 10% 이상 유지했던 영국의 노던룩이 하루아침에 파산한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돈맥경화 원인의 하나인 은행의 대출기피 현상을 진정시키는 것도 시급하다. 이를 위해 정부의 보증확대가 절실하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규모를 확 늘려 은행들이 BIS 비율 하락을 걱정하지 않고 과감히 대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은행들의 대출 위험을 낮춰줘야 돈의 물꼬가 트인다.

대부분의 경제 예측 기관들은 내년 상반기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비해 관련 법도 미리 손질해 둘 필요가 있다. 현행 금융산업구조개선법과 예금자보호법에는 은행의 BIS 비율이 8% 밑으로 떨어져야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 있다. 공적자금이 '부실 은행’의 설거지 용도로 제한돼 있는 것이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은 금융시스템이 흔들리자 BIS 비율 잠정치를 근거 삼아 과감히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우리도 미리 준비해야 공적자금을 선제적이고 예방적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금융위기에는 신속하고 과감한 대응이 생명이다. 금융위기가 현실화된 뒤에야 움직이면 너무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