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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여군 강간사건의 경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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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해 9월 6일 오후 11시30분 인천공항 청사 밖으로 나선 열아홉살의 미국 여군은 난감했다. 군산의 공군기지로 가는 버스를 놓쳤기 때문이다. 이때 한 한국인 택시 운전기사가 군산까지 태워주겠다며 접근해서는 호텔로 데려갔다. 인천지방법원은 1심에서 택시운전기사에게 강간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최근 서울의 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강간이 성립하려면 피고가 피해자의 저항을 압도할 정도의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 데 그런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낯선 상황이고 늦은 밤이었으므로 여러 가지가 두려웠던 피해자가 지레 저항을 포기했을 뿐이니 강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여군은 택시 운전기사와의 하룻밤을 위해 열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얘기냐." 주한미군 측이 발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팔이 안으로 굽었다는 오해를 살 만하다. 이처럼 입장을 바꿔보면 미군도 한국에 대해 섭섭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열흘 전쯤 미군들이 신촌 일대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미군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출동한 한국 경찰은 문제의 미군을 미 헌병에 넘겨버렸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르면 공무집행 중이지 않은 미군의 범죄에 대한 사법처리 권한은 한국 측에 있다. 그럼에도 경찰은 일단 문제의 군인을 미군 헌병대에 넘겼다. 만취한 미군을 제압해 조사하는 게 귀찮았거나 그럴 능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미군 측의 주장이다. 며칠 뒤 이 미군은 다시 한국의 경찰서에 출두했다. 마치 한국 측의 요구로 미군이 마지못해 수사권을 넘겨줬다는 인상을 풍기면서 말이다.

우리는 SOFA 개정을 얘기할 때마다 미군 범죄의 사법관할권이 보다 폭넓게 한국 측에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대사와 국내 언론사 국제부장.논설위원 등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어떤 신문사의 간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군의 추가 파병지로 결정된 이라크의 아르빌이라는 곳은 굳이 외국군의 평화 유지 기능이 필요하지 않은 안전한 지역이다. 더구나 지난 총선에서 추가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대거 당선됐다. 17대 국회가 개원하면 그들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또 미국 내에서조차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사정이 그런데 굳이 한국군이 추가로 이라크에 가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허버드 대사는 어떤 형태로든 한국군이 이라크와 미국을 도와준다면 고마운 일이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가 외교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답했을지 모른다. "인명 피해가 나지 않을 안전한 곳에 파병하겠다고 해서 마지못해 그러라고 했더니 이젠 안전하니까 안 가도 되는 것 아니냐고? 그래 보내지 마라. 대신 그만큼 주한미군을 더 빼 가도 군소리는 마라."

한.미동맹이 전환기를 맞은 것은 분명하다. 여러 사정이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다. 5000년이 넘는 우리의 역사에서 미국이 우리 안보의 버팀목이었던 기간은 50년 남짓일 뿐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우리 혼자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세상의 끝은 아니다. 그러나 한.미동맹의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의 방법이 너무 거칠어 보인다. 실속없이 상대방만 기분 나쁘게 만드는 어설픔도 도처에서 묻어난다. 한.미동맹에 관한 한 주장과 요구를 앞세우기 전에 앞뒤를 살피고 우리 자신을 다듬고 준비하는 게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이재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