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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국난 풀무질하는 3대 주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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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항상 그랬다. 경제위기의 제물은 항상 그들이었다. 구멍가게 주인, 영세 자영업자, 중소 하청기업과 노동자, 청년 구직자, 파트타이머, 비정규직 근로자들이야말로 경제대란을 막는 방벽이었고, 때로는 뚫려 속절없이 무너지는 소모적 방패였던 게 ‘위기의 인구학’ ‘위기의 정치경제학’이었다. 그런 광경에 무뎌지는 것이 금융자본주의의 본색인가. 국난 진압의 소방수들이 변죽만 울려대는 한국의 현실을 두고 외국 기관들은 냉소적 가십을 연일 쏟아내고 있는데, 시중은행은 제 살기 바쁘고, 국회는 정체성 투쟁에다 예산싸움만 하고, 둘 사이에 끼여 쩔쩔매는 정부는 신통치 않은 처방만 찔끔찔끔 내놓고 있다. ‘배째라 은행’ ‘딴전 국회’ ‘요실금 정부’-국난을 풀무질하는 3대 주역이다.

사태가 이렇게 꼬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진맥진한 장바닥에서는 이런 막말들이 예사로 터져 나온다. 은행, 그 시중은행들 말이지, 물 좋던 시절에 돈 더 벌려고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니 투자은행(IB)이니 해가면서 외국 자금 마구 빌려 돈놀이할 때는 언제고, 막상 다급해지니까 정부고 금감위고 누구 말도 안 듣고 금고 채우기에 바쁜 그 돌발적 처사가 괘씸하지 않은가 말이다. 돈 풀어 집 사고 사업 늘리라고 꼬실 때는 언제고. 아니, 한국은행에서 채권 사주고, 돈 풀어서 은행들 도와주면, 그 돈이 곧장 은행 금고로 직행해 꾹꾹 채워지는 판인데, 대통령이 분노하든 어명을 내리든 제 살기 바빠 꿈쩍도 않는 은행들, 더군다나 은행의 외국인 대주주들은 한국 경제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아무 상관하지 않는 판인데 뭘로 이 ‘배째라 은행’들을 움직일 것인가 말이다. 은행이 넘어지면 국가경제도 무사하지 않을 터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투입할 수밖에, 그거 다 우리 혈세 아니가? 혈세로 은행 돈 버는 것 도와준다? 이게 어디 제대로 된 상도(商道)인가? 열 내봐야 부질없는 짓, 속만 탈 뿐.

그럼, ‘딴전 국회’, 저 사람들은 다 뭐하고 있나. 돈 줄 말라 기업들 쓰러지고 감원 광풍이 몰아칠 판에 뭐, 대안 야당에 강경 야당? 한가한 소 풀 뜯는 소리야. 싸워도 말이야, 일자리, 서민 보호에 꼭 필요한 예산을 처리해주고 싸우지, 이때다 싶어 물고 늘어지면 어쩌자는 거냐? 협력정치란 거, 그거 우리 정치사전에는 없나? 뭐 민주연대?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어쩌겠다고, 이 지경에? 172석 한나라당은 거세증에 걸렸나, 아니면 자폐증? 보증기금에다 연기금 등 자금 경색을 풀 수 있는 기금이 널려 있는데, 그런 비상 돌파구 하나 못 만들고 끌려 다니는 게 집권당인가 말이다. 도대체, 머리가 나쁜가, 놀고 있나, 아니면, 구경하는 거냐?

정부는, 부산만 떠는 정부는 뭐 요실금에라도 걸린 건가? 급하면 경제팀 회의실을 워룸(war room)으로 바꾸겠다고? 그 워룸에서 무얼 내놨는데 그동안…? 환율도 미쳐 날뛰고 외화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기획재정부는 10·19 조치 이후 손 놓고 있고, 금융위원회는 헛발만 차고, 경제팀은 한국은행에 돈 풀라고 압력만 넣고, 셋이 만나 손잡고 사진 찍으면 그게 공조냐. 약발 없는 대책을 찔끔찔끔 내놓지 말고, 일본처럼 300조를 소비 진작에 쏟아 붙든가, 중국처럼 700조 대형 국책사업을 과감히 발표하든가, 아니면 은행이라도 완전히 구워 삼든가, 뭐 그럴듯한 게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오줌발이 시원치 않으니, 대통령만 동분서주하는데, 70년대 실력 갖고 경제팀이 이 사태를 막아낼 수는 있나? 차제에 드림팀으로 바꿔 극약 처방, 대형 처방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무력감에 찌들고 분노에 목멘 장바닥의 말투는 욕설로 변하고 있다. ‘배째라 은행’ ‘딴전 국회’ ‘요실금 정부’-이 국란의 삼역(三役)들이 언제 정신 차려 민생을 보살필 것인가.

송호근 서울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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