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에서는 이런 오락적 요소들로 인해 007을 전통적인 스파이 영화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고 있지만 오히려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스파이영화에서 007의 각종 첨단장비와 아이디어를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007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첨단 장비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007의 본드카로 등장하는 애스턴 마틴 DBS(Aston Martin DBS)는 자동차 본연의 성능에 충실할 뿐이고 그나마 첨단 장비라고 할 수 있는 핸드폰조차도 상용 PDA 이상의 성능은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각종 첨단무기를 스스로 버린 007이 선택한 최후의 무기는 바로 영원한 007의 권총, 월터 PPK였다.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실시된 ‘무엇이 가장 007을 007처럼 보이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검정색 턱시도 정장, 제임스 본드라는 007의 이름 그리고 월터 PPK를 007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응답했다고 한다. 사실 영화 007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월터 PPK는 그리 낯선 권총이 아니다. 007시리즈 1탄인 살인번호(Dr. No·1962) 이후 30년 이상 제임스 본드의 권총으로 스크린에서 활약해 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작 소설에서 007은 이탈리아 베레타의 M1919 권총을 6번째 시리즈인 닥터 노(Dr. No)까지 사용하다 상관인 M의 명령에 의해 PPK로 권총을 바꾸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우리나라 격언에 잘 어울리는 이 권총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 요원들이 즐겨 사용해 악명을 떨쳤다. 적국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성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 연합군에서도 유럽에 침투하는 비밀요원들에게 PPK를 지급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10.26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범행에 직접 사용한 권총으로 유명하다. PPK는 어른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구조가 간단해 분해조립이 쉽고 고장이나 오작동의 위험은 적은 반면 다양한 구경의 권총탄환을 선택해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 PPK에 익숙해지면 정확히 조준하지 않아도 9m 이내의 거리에서는 정확히 표적에 명중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근거리에서 사용할 경우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다만 시대가 바뀌고 새로운 권총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1980년대 이후 스파이 권총의 대명사로 불리던 PPK도 점차 일선에서 퇴역했고 현재는 민수시장에서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속에서 조차도 007의 PPK 사랑에 제동이 걸리는데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17번째 시리즈인 골든아이(Golden Eye·1995)에서 등장인물들 간의 대사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이후 007은 18번째 시리즈인 네버다이(Tomorrow never dies·1997)부터 보다 대형의 발터 P99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번째 시리즈인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1999), 20번째 시리즈인 어나더데이(Die another day·2002)를 거쳐 전작인 007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2006)에서 조차도 월터 P99를 사용하던 제임스 본드가 007의 영원한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월터 PPK를 다시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최초 스파이 첩보물로 등장했지만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한 나머지 그간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 버렸던 007의 원작으로의 회귀 즉 007의 자아 찾기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007이 첨단 무기를 버리고 PPK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007은 스파이이기 때문이다.
계동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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