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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위기의식 마비 지대,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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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쨌든, 현재진행형인 빅3 사태 외에도 미국 의회는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금융위기를 진정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폴슨은 아예 미국 의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헬리콥터를 동원해서라도 돈을 살포해야 겨우 연명할 수 있다’고 호소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버냉키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의회와 긴밀한 협력망을 구축했다. 의회는 공청회와 청문회를 풀가동하는 한편, 미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온갖 대안을 짜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권교체로 인한 행정력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물론, 미국발 재난이 세계적 불행으로 파급되는 연결고리를 끊느라고 눈코 뜰 새 없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이 파산하고, 서브프라임 사태가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강타할 것임을 삼척동자라도 다 알아차릴 수 있었던 지난 9월 초순 이후 지금까지 우리의 국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9월 한 달은 쌀 직불금 문제로 티격태격하더니, 10월은 종부세 문제로 그 아쉬운 시간을 낭비했다. 쌀 직불금 문제는 농심(農心)을 훔쳐간 불량 수급자를 적발해 환불받고 재발방지안을 만들면 된다. 종부세가 여야가 대치해야 할 그리 시급한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민주당은 ‘부자 감세 결사 저지’ 머리띠를 두르고, 한나라당은 당정협의안도 못 만들어 결국 당에 일괄 위임했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소비가 악화돼 자영업자들의 줄도산 비명이 온 천지를 진동하는 이때, 종부세 환급액을 고스란히 나눠주는 이 어이없는 짓은 ‘바보 정치’ 아니곤 상상할 수 없다. 서민들 약 올릴 일이 있는가, 아니면 그중 일부라도 쿠폰으로 지급해 내수 진작에 보탤 방법은 없었는가? 172명을 거느린 거대 여당의 대표가 며칠 전 당 창당일에 그랬다. “일파만파를 진정시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우리가 할 소리다. 아니, 만파식적을 찾아 안간힘을 쓰는 의원 몇 명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한국 경제는 10년 전 외환위기 때보다 더 화급하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환율과 주가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잘나가던 조선산업이 휘청거리고, 장기불황에 빠진 건설산업에 도미노 부도가 임박해 있다. 아직 지층 저변에서 몸을 뒤틀고 있는 서브프라임 활화산이 본격적으로 폭발한다면, IT·증권·철강·석유화학·제철·자동차 등 모든 주력 산업이 검은 화산재로 덮일 것이다. 본화산의 용틀임을 겨우 진정시킨다 해도, 올겨울 동안만 세계 20여 개국이 국가파산을 당할 예정이고 보면, 이게 어디 정부의 행정력에만 맡길 일인가 싶은 것이다.

국가재난 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행정이 아니라 정치의 몫이다. 정당은 왜 있고, 국회는 왜 존재하는가? 한국의 국회에도 공청회와 청문회 제도가 있다. 공정택 교육감 불법선거 시비, 종부세와 쌀 직불금 공방전 외에, 이 ‘혹한의 겨울’을 몰고 온 최악의 금융위기와 공황사태로 국회가 공청회를 열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21일, 예산결산특위가 열렸던 회의에 정원 49명 중 9명만 참석했다. 다 어딜 갔는가. 18대 정기국회에서 인준된 안건은 모두 12건, 그중 한국 경제의 존망과 관련된 것은 ‘은행에 대한 1000억 달러 외화 지급동의안’이 유일했다. 그나마 행정부가 요구한 안건이었다.

대통령은 이자율을 낮추고 돈을 풀라고 호통을 친다. 정부가 이미 풀어놓은 133조원은 은행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업은 돈줄이 말라 쓰러지고, 서민들은 내수가 말라 앓아누웠다. 성한 곳이 없는 한국 경제에 혹한의 바람이 몰아치는데, 민주당은 김민석 최고위원 구조대나 결성하고, 한나라당은 집권당으로서 할 일의 우선순위가 뭔지도 모른 채 좌충우돌이다. 국회, 똑똑한 299명의 직업정치가들이 모인 그곳엔 위기의식을 마비시키는 달나라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