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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로 발돋움할 환상의 배역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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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무대는 평등하지 않다. 수많은 역할이 무대에 등장하지만 정작 관객의 눈을 확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인물은 손에 꼽힌다. 그래서 물었다. 뮤지컬 배우들이 가장 탐내는 배역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답변을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극중 배역의 나이로 세분했다. 이름하여 ‘연령대별 최고의 배역’인 셈이다. 국내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 중인 뮤지컬 남자 배우 33명이 설문에 답했다.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내외를 통틀어 각 배역을 가장 잘 연기한 배우는 누구였는지 전문가 5인으로부터 들어봤다. 수십 혹은 수백 명의 연기자가 거쳐 갔건만, 사람들의 뇌리엔 초연의 강렬함이 큰 듯싶었다.

최민우 기자

10대
빌리 엘리어트‘빌리’역

하늘 높이 날아가는 소년 발레리노를 본 적이 있는가. 영국 북부의 작은 탄광촌, 11세 소년 빌리는 아버지의 강요로 권투를 배운다. 우연히 목격하게 된 춤에 소년은 글러브를 팽개치고 운명처럼 토슈즈를 신는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에 ‘로열 발레 아카데미’란 얼마나 허망한 열망인가. 아버지는 완강했다. 소년도 좌절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 텅 빈 체육관을 찾은 빌리는 ‘나홀로 댄스’에 푹 젖어든다. 환영(幻影)처럼 나타난 미래의 자신과 함께 파드되(2인무)를 추며. 10대 소년의 성장형 뮤지컬인 ‘빌리 엘리어트’는 연기와 노래, 발레 등 뮤지컬 배우의 모든 기본기를 닦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최고의 빌리는 리암 모우어= 지금껏 영국·호주·미국 등에서 빌리를 연기한 아역 배우는 모두 31명. 그중에서도 2005년 영국 초연 무대에서 금발을 휘날린 리암 모우어가 첫 손가락에 꼽힌다. 깜찍한 용모·고음의 미성·탁월한 발레 실력 등 3박자를 두루 갖춰 “배역을 위해 태어난 듯 보인다”(조용신)는 평가다.


20대
렌트‘로저’역

로저에 대한 배우들의 애착은 남다르다. “만약에 내가 로저를 연기했다면, 나의 20대는 더 깊어졌을 것”(이석준) “음악을 듣고 머리에 뭔가 맞은 듯했다. 영어 대본을 구해 워크숍도 했다”(이건명) 등이다. 김도현씨는 “자신의 몹쓸 병, 척박한 세상과의 충돌, 그 안에 꿈틀대는 음악에 대한 열정. 그게 20대 후반 우리들의 자화상 아니겠는가”라고 말한다.

‘렌트’엔 세상과의 불화가 담겨 있다. 그 중심인물이 에이즈에 걸린, 고독한 로커 로저다. 로저의 어두움은 브로드웨이 공연 직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작가 조너선 라슨의 그림자와 오버랩되면서 배우에게도, 팬들에게도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로저는 애덤 파스칼=그는 1970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부터 록밴드의 리드 싱어를 해왔다. 작품의 로저와 잘 맞아떨어지는 이력이다. 반항적 이미지, 상처받고 고뇌하는 예술가적인 풍모,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젊음 등을 빼어나게 연기했다.


30대
지킬앤하이드‘지킬’역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인간에겐 누구나 이중성이 있다. 그리고 배우라면 그 극한대를 체험하고, 표현하고 싶어한다. 배우들의 로망이 고스란히 무대화된 작품이다.

노래 또한 극적이다. 어느새 뮤지컬 대표곡이 돼 버린 ‘지금 이 순간’은 지킬 박사의 신념을 강렬하게 표현하며, 하이드로 변신한 순간 터져나오는 ‘얼라이브’는 마치 무대를 삼킬 듯 폭발적이다. 설문에 응한 배우 중 절반이 넘는(18명) 지지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최고의 지킬은 조승우=한국 배우론 유일하게 뽑혔다. 아직 20대에 불과한 조승우가 ‘최고의 30대 배역’에 선정됐다는 점도 이채롭다. 전문가들은 90년대 말 유럽을 강타했던 제바스티안 바흐,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지킬을 연기했던 브래드 리틀 등이 가창력에선 조승우보다 앞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승우 표 지킬엔 드라마가 있었다. 디테일한 감정 표현, 선과 악의 극명한 대비, 폭발적인 무대 장악력 등 전 세계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캐릭터를 조승우는 창조해 냈다.


40대
오페라의 유령‘유령’역

유령은 크리스틴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약혼자(라울)가 있다. 배신감에 휩싸인 유령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쿵-”하며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크리스틴을 납치한다. 그리곤 협박한다. “나를 선택하라, 아니면 라울이 죽는다.” 그러자 크리스틴은 유령에게 키스한다. 라울을 구하기 위해서다. 인간의 진심은 유령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법. 절망감에 휩싸인 유령은, 그래서 세상을 떠나간다.

질투·비열·좌절…. 전능하나 심성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까닭에, 유령의 캐릭터는 매혹적이다.

◆최고의 유령은 마이클 크로퍼드=42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다. 불우한 유년기를 벗어나려는 욕망 때문인지 그는 코미디언으로 주로 활동했다. 그래서 뮤지컬 무대에서 좀체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한물 갔다”는 비아냥을 듣던 40대 중반에 도전한 ‘오페라의 유령’을 통해 그는 “인간의 목소리라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괴이함과 금속성”이라는 평가와 함께 원조 유령으로 뮤지컬사(史)를 장식하고 있다.


50대
레미제라블‘자베르’역

장발장이 아니다. 조역 자베르 경감이다. 유일하게 주인공이 아닌 배역이 뽑혔다.

장발장이 깊은 울림이 있긴 하나 휴머니즘이라는 단선적 성격인데 비해 자베르는 선과 악을 넘나든다. 장발장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한다. 차가운 냉혈 인간마냥 때론 비정하다. 그러나 막판 장발장의 숭고한 인간애 앞에 자신이 평생 지켜온 ‘정의’라는 신념은 앙상한 껍데기로만 남게 된다. 그리고 자살한다. 이런 심경변화를 따라가기란 녹록지 않다. 그래서 더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다. “상상력이 아닌 경험에서 표현 가능한 배역”(임철형) 등의 의견이다.

◆최고의 자베르는 필립 퀘스트=초연 배우가 아님에도 최고란 평가다. 57년 호주에서 태어난 그는 87년 자국 무대에서 자베르를 연기하고, 2년 뒤 영국 웨스트엔드까지 진출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96년 ‘레미제라블’ 10주기 기념 공연에서도, 98년 카메론 매킨토시의 업적을 기려 마련된 특별 공연 ‘Hey, Mr. Producer!’에서도 자베르 역은 퀘스트 몫이었다. “매혹적인 중저음을 바탕으로 복잡한 이면을 포착해낸다”(원종원)는 평가다.


60대
지붕 위의 바이올린‘테비에’역

노년의 배우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테비에는 노년의 회한을 그대로 응축시킨 배역이다.

작품의 배경은 1900년대 초반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방의 유대인 마을. 아버지 테비에에겐 다섯 명의 딸이 있다. 중매쟁이의 소개로 큰 딸은 푸줏간 주인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조한다. 그러나 딸은 이를 거부한다. 테비에는 흔들린다. 그건 서막일 뿐이다. 둘째는 가난한 혁명가와, 셋째도 러시아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엄하면서도 한없이 약해지는 아버지를 보는 건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최고의 테비에는 제로 모스텔=64년 초연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아직까지도 생명력을 갖게 된 원동력은 전설적인 코미디 배우 제로 모스텔(1915~77)의 공이 크다. 러시아계 유대인의 어눌한 발음, 비음이 섞인 후렴구 등은 모스텔만의 장기다. 뮤지컬과 연극 두 장르에서 모두 토니상을 받은 최초의 연기자이기도 하다. 77년 필라델피아에서 연극 리허설 중 갑자기 사망했다.


◆ ‘최고의 배역’ 설문에 응해준

뮤지컬 남자 배우 33명(가나다 순)

강연종·강태을·강필석·고영빈·김도현

김법래·김봉환·김성기·김우형·김재범

김진태·김호영·남경주·민영기·서범석

성기윤·송용진·송창의·신성록·양준모

오만석·윤형렬·이건명·이석준·이율

이희정·임철형·임춘길·정성화·조정석

한지상·홍경수·홍광호

◆ ‘최고의 배우’ 설문에 응해준

전문가 5인(가나다 순)

문미호(매지스텔라 대표)·설도윤(설앤컴퍼니 대표)·원종원(뮤지컬 평론가)·정소애(신시뮤지컬컴퍼니 실장)·조용신(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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