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여사가 밝힌 성장과 사랑-그레이엄 자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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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어린 시절과 부모님*** 인간의 운명은 우연하면서도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1908년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32세의 청년사업가 유진 메이어가 21세의 가난하지만 아름다운처녀 애그니스 언스트를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하게 됨으로써.나'라는 존재껵 이야기가 시작됐으니 말이다. 나는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6월16일 메이어 부부의5남매 가운데 4번째로 태어났다.아버지는 결혼할 당시부터 이미수백만달러의 재산을 모은 성공한 사업가였고 신문사 프리랜서로 일했던 어머니는 결혼으로 하루 아침에 부잣집 사모님으로 변신한경우였다.그러나 부모님의 결혼생활은 경제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심각한 정신불안 증세를 보이는등 행복했다고만은 여겨지지 않는다. 부모님은 다른 모든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녀들에게 상당한 기대를 거셨다.내가 고등학교 때 반장으로 뽑히자 아버지는 정말 뛸듯이 기뻐하셨다.고등학교 시절 스스로 수줍은 성격이라고생각하면서도 그레타 가르보등 유명인들을 동경하며 나도 언젠가 유명해지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어쩌면 부모님의 그같은 기대감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언론인으로서 출발***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뒤 나는 아버지의 소개로.샌프란시스코 뉴스'라는 작은 석간신문사에서 기자수업을 시작했다.1933년 6월에 워싱턴 포스트지를 인수한 부친이 나를 기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아는 사람도 없는 샌프란시스코의 보잘 것 없는 신문사에 보낸 것이었다. 급여는 주당 21달러였고 당시 샌프란시스코 뉴스지의 경쟁지로는 신문재벌 허스트의.콜 불리틴지'가 있었다.낯선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기자수업은 쉽지 않았다.그러나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공황을 전후한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이 극에 달했다. 시체가 뒹구는 파업현장을 누비며 부두노동자들과 어울렸다.맥주에 위스키 한잔을 넣은.보일러 메이커'라는 싸구려 술을 그들과나눠 마셨다.나중에 유부남으로 밝혀진 노조지도자와는 한때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노동자들로부터 기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비로소기자로서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의 기사를 빼놓지 않고 읽었다.더 많은 기사를 쓸것과 국제문제를 보는 시각을 키우라는 식의 조언도 해주었다. 1939년 봄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찾아오셨다.그리고 워싱턴 포스트에 입사할 것을 권유했다.그해 4월24일자 타임지 인물난에는 나의 사진과 함께“워싱턴 포스트지 발행인의 딸 캐서린메이어(21)가 주급 25달러로 워싱턴 포스트 논설위원실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결혼생활 ***나보다 두살 연상인 남편 필 그레이엄과는40년초 친구 소개로 만났다. 그는 사우스다코타에서 태어나 플로리다대를 졸업한 뒤 암으로 사망한 모친의 유언을 받들어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사람이었다.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대법원 서기로 근무하는 지적이며 매력적인 젊은이였다. 그해 우리는 결혼했고 신혼생활은 검소했지만 행복했다.필은 처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아가려고 상당한 신경을 썼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위 필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필을 신문사로 끌어들이기 위한 아버지의 권유는 계속됐고 마침내 46년1월 필은 30세의 젊은 나이에 워싱턴 포스트의 부발행인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사위인 필을 신문사로 영입한 뒤 자신은 트루먼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계은행 초대총재로 옮겨갔다.아버지는 신문사를 떠나면서 딸인 내가 아니라 사위에게 워싱턴 포스트의 최대 주주 자리를 넘겨줬다.남편이 아내가 주인으로 있는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철학이었다.31세의 나이에 워싱턴 포스트 운영의 전권을 이어받은 필은 뉴스위크를 인수하는등 회사를 성장시켰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심각한 우울증세를 나타냈다. 남편은 한때 뉴스위크의 여기자 로빈과 사랑에 빠져 나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남편과 워싱턴 포스트 모두를 잃을뻔한 나에게는 가장 큰 시련의 순간이기도 했다. [정리=장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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