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나다>청량리역 최은 순경 588 순찰 석달맞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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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청량리 역전파출소 소속 최은(26)순경은 오후11시면 파출소옆 속칭 588로 순찰을 나간다.행정구역으로는 서울동대문구전농2동588.
비좁은 골목속 나란히 늘어선 단층건물은 살아있는 여체를 전시하는 쇼윈도다.유리속에는 엷고 화려한 옷을 걸친,짙은 화장의 얼굴들이 최순경을 빤히 바라본다.그들은 유리문 밖에서 손님을 끌고 있다가 최순경의 경찰모자가 불빛속으로 들어서 자 본능적인듯 순식간에 쇼윈도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최순경의 시야 밖으로 도망치지는 않는다.루즈 짙은 입술사이에 물었던 담배를 뽑아 등뒤로 감추면서 어색한 목례를 하기도 한다.“알고보면 다 동생같은 애들이죠.가끔 고향.나이도 물어보고,일 끝나면 뭐하는지 관심도 기울여 줍니다 .그 아가씨들은 저한테 말을 걸지 못해요.내가 말을 걸면 반가워는 하지만.얘기해보면 참 착해요.그런데 그냥 그런 인사치레 말고 그네들에게 더 할 말이 없더라고요.그게 나쁜 일이란 걸 모르는 것도아니고….그렇게 알고보면 뭐라고 비난 할 수도 없게 되더군요.
” 경찰과 매춘부.같은 20대 젊은 여자면서도 너무나 다른 처지에 서로 할 말이 없다고 한다.최순경이 느끼는 연민의 정이 그들에겐 값싼 동정으로 여겨질게 분명하고,몸을 파는 아가씨들의최순경을 바라보는 눈길은 열등감을 들쑤시는 가슴앓 이일 뿐이다.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피하고 싶어한다.그렇지만 그럴 수 없는게 또 서로의 업(業)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순경은 연민의 정은 감추면서.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자'라는 다짐을 속으로 할뿐이다.
그들도 최순경처럼 다 포부를 가지고 산다.그들은 대부분.빨리돈 벌어서 작은 가게라도 차려 독립하자'는 꿈을 꾼다.간혹 남자친구를 잘못 만나 어렵게 번 돈을 날리거나 마약에 빠지기도 한다지만 떳떳이.사장님'으로 변신하는 악바리도 적지 않다.
그들의 꿈이 실현 가능해진 것도 588의 세태변화 덕분이다.
한 때는 무작정 상경한 시골소녀,인신매매범에게 잡혀온 소녀들이이 바닥 주인공들이었다.당시 소녀들은 감금당한채 윤락을 강요당해야 했다.그러나 요즘 588의 꽃들은 출퇴근하 는 직장여성들과 다름없다.제 발로 찾아왔다가 스스로 걸어나간다.그래서 문을닫는 가게도 생겨날 정도다.
최순경은 전주시청 공무원인 아버지 슬하에서 전북대를 졸업할 때까지 그냥 평범하게 자랐다.경찰을 지원한 것도 사실은 굴곡없는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서였다.여자경찰의 경우 거의 예외없이 사무실 안에서 일하는 보직을 받기에 근무조건면에서 일반 공무원과 다를바 없다.이런 사정을 아는 친구의 권유에 그녀는 별다른망설임없이 지난해 4월 경찰관 채용 공시에 응시,3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그런데 조치원 경찰학교에서 6개월 교육을 마치고 배치받은 곳이 청량리경찰서였고,야속하게도 서장님은.관할권내 윤락녀 선도를여자경찰에게 맡겨보자'는 파격적인 발상을 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악몽인가 했어요.역전에다 사창가까지 담당한다고 하니 겁도 났고요.이제 조금씩 적응이 되면서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해요.처음에 이런 어려운 경험을 해보는게 길게 봐서 도움이 될거고,그렇게 생각하면 재미도 생기니 까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최순경은 이제 주위에서.힘들겠다'는 얘기를 들으면 자신있게“도전해볼만 해”라고 대답한다.얼마전에는 여고3년생이 경찰이 되고싶다며 찾아와“멋있게 살 수 있다”고 격려해주기도 했다.
최순경은 귀걸이와 청바지를 유난히 좋아하고,근무가 없는 날이면 신촌 카페에서 친구들과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신세대답게 비록악연으로 시작한 일이지만.도전하는 삶'으로 즐기고 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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