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영화] 홍콩판 '폰부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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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딸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공학 디자이너 그레이스(서희원)가 납치된다. 괴한들은 남동생이 어디 있는지 실토하지 않으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영문을 모르는 채 위기에 몰린 그레이스는 부서진 전화기 선을 간신히 이어 무작위로 통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장난전화로 여긴 사람들은 받는 족족 전화를 끊어버린다. 천신만고 끝에 연결된 사람은 공항으로 아들을 만나러 가던 빚 수금원 밥(고천락). 역시 실없는 농담으로 전화를 끊으려던 밥은 총성을 듣고 납치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밥이 구조요청을 한 사람은 강력반에서 좌천돼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경찰 아휘(장가휘). 아휘 역시 처음엔 황당한 얘기라며 무시하지만, 곧 납치범 일당이 인터폴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인터폴 요원들이 노리는 건 그레이스의 남동생이 우연히 캠코더에 담았던 마약거래와 살인 현장 동영상이었다.

‘커넥트'는 킴 베이신저 주연의 ‘셀룰러'(2004년)를 ‘천장지구'‘성룡의 CIA'를 연출한 진목승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전화를 끊으면 그녀가 죽는다(If the signal dies, so does she)'는 홍보문구를 사용하는 것도 원작과 똑같다. ‘셀룰러'는 전화를 소재로 한 빼어난 스릴러 ‘폰부스'(2002년)의 래리 코언이 각본을 썼지만 범작에 그쳤다. 래리 코언 각본의 원작을 염두에 두더라도 엄격히 말해 이 영화를 스릴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납치범의 정체와 납치 이유 등 주요 플롯이 관객에게 별다른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바지의 공항 대결 장면에서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둘러싼 작은 반전이 있긴

하지만, 정통 스릴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애교 수준. 관객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대목은 전화가 끊기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몇 번의 고비 정도다.

‘웰메이드 스릴러'를 기대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커넥트'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가녀리고 어여쁜 여배우, 도심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액션, 명확한 선과 악의 구분 등 홍콩영화의 익숙한 공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눈을 비비고 볼 정도의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야기와 액션이 겉도는 정도는 아니다. 대로변 역주행, 지하 하수통로 질주 등으로 꾸며진 자동차 추격 장면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스피디하고 현란하다. 밥 역의 고천락은 휴대전화를 받으며 질주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대역 없이 연기했다. 아휘 역의 장가휘도 범상치 않은 인상을 남기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저 배우 누군가'싶은 인물은 납치범 두목 유엽이다. 극악무도한 캐릭터는 악역치고는 단선적이긴 하나 눈빛 하나는 일품이다. 천카이거(陳凱歌)가 연출하고 장동건이 출연한 ‘무극'에 검은 늑대로 나왔던 그 배우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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