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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성장기에 외환위기 겪더니 … 불황 늪 다시 빠진 ‘트라우마 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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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유명 사립대에 재학 중인 김모(26)씨는 요즘 매일 밤잠을 설친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수십 곳에 입사원서를 냈으나 모두 낙방했다. 남은 기회는 다음 주에 있을 A사의 면접뿐이다.

그가 고교 2학년이던 1999년 아버지의 사업체가 부도를 맞았다. 외환위기의 여파였다. 하루 아침에 집이 넘어가 ‘도망치듯’ 이사를 했다. 과외·학원 강의를 다 끊고 장학금으로 고교를 마쳤다. 대학 등록금도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다.

학기 중에도 과외, 학원 강사로 돈을 벌었다. 어렵게 마련한 돈을 쪼개 중국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토익점수 같은 ‘취업 스펙’을 갖추려 휴학도 했다.

하지만 막상 졸업반이 되자 취업난에 발목을 잡혔다. 미국발 금융위기 탓이다. 17일 만난 김씨는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으로 버텼는데 하필 취업 시기에 다시 불황이 닥쳤다. 우리는 운 없는 세대”라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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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사회진출기 ‘불황 직격탄’=대한민국 20대가 절망에 빠졌다. 중·고교 무렵엔 외환위기 여파로 부모 세대의 부도·실직을 경험하더니 요즘엔 취업대란에 시달리고 있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 교수는 취업 시기를 맞은 20대를 ‘트라우마(외상) 세대’라고 불렀다. 이들은 민주화 이후 호황기에 대학에 들어간 ‘신세대’나 외환위기를 극복한 한·일 월드컵 무렵 성장한 ‘2.0세대’와는 다르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요즘 20대는 경제적 안정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지녔다”며 “다른 세대보다 취업을 위해 노력해온 20대 중·후반이 역설적으로 직격탄을 맞았다”고 지적했다.

◆“꿈은 없고 현실만 남은 세대”=트라우마 세대는 스스로 ‘불운한 세대’라 부른다. 올해 졸업반인 이모(25·여)씨는 “꿈은 없고 현실만 남았다”고 말했다. 98년 이씨가 중3일 때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당이 망했다. 이듬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어머니는 학비와 교복을 마련하려 한복 단추 같은 금붙이까지 모아 팔았다. 2002년 고교를 마친 이씨는 진학 대신 보험사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다. 퇴근 후엔 카페나 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2005년 자신이 모은 학비로 서울 소재 사립대의 상경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금융전문가를 꿈꾸던 이씨는 몇 달 전 터진 미국발 금융위기로 사실상 취업을 포기한 상태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다니는 박모(25)씨는 졸업을 앞두고 휴학계를 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원이던 박씨의 아버지는 외환위기 당시 명예 퇴직을 했다. 박씨 가족은 아버지의 퇴직금과 연금으로 생활을 해 왔지만 최근 경제위기를 맞아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박씨는 대학 졸업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당장 중소기업에라도 취직을 할 생각이다. 박씨는 “10년 전 아버지의 퇴직이라는 악몽이 지금 나의 휴학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대학에 다니다 군복무를 위해 귀국한 배모(26)씨는 내년 초 복학 여부를 놓고 고심 중이다. 치솟은 환율 때문이다. 배씨는 “10여 년 전 건축업을 하다 부도를 맞았던 아버지의 당시 상황이 지금 나에게 재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곽금주(심리학) 교수는 “이들은 성장기와 사회 진출기에 연달아 사회적 좌절을 경험한 세대”라며 “자칫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고 진단했다.

김진경 기자


◆트라우마(trauma) 세대=트라우마란 심 한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겪은 뒤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으로 천재지변, 대형 사고, 범죄 피해 등을 겪은 뒤 발생한다. 김호기 교수는 중·고교 시절 외환위기를 맞아 부모의 실직·부도 를 간접 경험하고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취업 대란에 맞닥뜨린 20대 중·후반을 일컬어 트라우마 세대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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