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王孫'의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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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작은 원숭이를 미후(후) 또는 왕손(王孫)이라고 부른다.우리말의 원숭이는.왕손이'와 발음이 비슷하다.원숭이가 많이 사는 중국 강남(양쯔강 이남)의 오(吳).초(楚)나라 사람들에 의한.王孫'이라는 한자 표기는 남만(南蠻)의 이두(吏 讀)에 해당하리라.재미 있는 것은 원숭이 가운데는 실제로 왕의 자손이 많다는 사실이다.
관광지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발리섬에는.거룩한 언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낡은 힌두교 사원이 있다.상에사원이라고도 불리지만 관광지도에는 대체로.원숭이 숲'으로만 표시되는 이 곳에는 원숭이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이 곳 원숭이는 두 계급으로 분류돼 있다.하나는 생산자 계급이다.다른 하나는 오직 왕 원숭이.한 분'으로 구성되는 권력 계급이다.왕의 권력은 그 녀석이 원하는 이 숲속의 암놈은 모두제것이라는 것이다.그러니 이 원숭이 숲의 인구는 전왕(前王) 아니면 금상(今上)의 자손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펭귄사 발행.사회학 사전'의 권력 항목에는 정치에서 권력은 경제에서 돈에 상응한다는 구절이 있다.권력과 돈은 둘 다 사회체계의 공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반화된 능력이란 점에서 같다고 보는 것이다.
상에사원에 사는 생산자 계급 원숭이의 중요 생산 활동 가운데는 관광객 물건에 대한 악명 높은 날치기가 있다.안경.카메라.
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비행기표.여권.돈이 든 핸드백을 날치기 당하고 쩔쩔매는 일도 자주 생긴다.
그것을 돌려받는 방법은 관광객 옆을 따라 다니는 행상에게서 과일이나 과자를 듬뿍 사서 이미 높은 나무위에 올라가 당한 사람의 애를 태우려고 까불까불 시늉하는 녀석에게 교환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행상과 원숭이가 동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알 수 있다.원숭이는 음식을 벌고 행상은 돈을 번다.
권력과 돈은 그 잡고 버는 과정이 매우 다르다.돈을 버는 과정을 우리는 생산활동이라고 부른다.생산자는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이나 서비스를.잘'대령해 드리는 상급(賞給)으로 돈을 벌게 된다.상에사원의 행상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말할 것 도 없거니와원숭이의 날치기 묘기도 그 주인공이 원숭이니까 관광객에게 재미를 공급하는 생산활동이다.
돈을 버는 과정은 운동에다 비교하면 기록 경기같은 특성이 있다.경제적 경쟁이라는 것은 축구(구기)나 권투(투기)처럼 상대방을 직접 눌러 이기는 경기가 아니다.생산활동은 수요자에 의해그 기록이 채점된다.수요자가 칭찬하는 생산자가 이긴다.그 채점결과가 번 돈 액수로 나타날 때가 많을 뿐이다.
학생들의 공부 경쟁도 시험지와 싸우는 것이지 다른 학생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불교도가 성불(成佛)하려고 열심히 참선(參禪).수행(修行)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는 경쟁이다.절에서.삼밭속에서는 쑥도 곧게 자란다(麻中之蓬,또는 蓬生麻中 不扶自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쑥(악인)이 햇볕(진리)을 향해 삼(착한 사람)과 경쟁한 결과일 것이다.
대조적으로 상에사원 원숭이 사회의 유일 권력자인 왕 원숭이가권력을 잡는 과정에는 생산은 없고 피비린내 풍기는 주먹과 이빨의 직접 대결이 있을 뿐이다.암컷들이 발정을 하는 시기가 되면수컷들 가운데 왕위 후보자라고 스스로 믿는 놈 들 사이에 토너먼트가 벌어진다.물론 현왕(現王)이 가장 중심되는 쓰러뜨리기 타깃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옥좌(玉座)의 영화를 한번 누렸던 녀석들은 새 왕의 좀 떨어진 주변에서 몰락한 권력의 처량함을 꼭 상징하고 말겠다는 어떤필연적 의지이기라기도 한듯 우두커니 모여 앉아 세월을 보낸다.
이 사회의 권력은 곧 폭력이다.그래서 이들은 모 두 몸이.미후'아닌.원(猿)'에 가까울 만큼 크다.상왕(上王)들은 다시 생산계급에 합류해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원의 광장에서 지낸다.금상은 따로 혼자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어깨를 힘 주어 펴고 있다는 점에서 상왕들과 외모부터 다르다.
돈을 버는 것은 그 과정(생산활동)이 사람에게 홍익(弘益)을가져오지만 권력은 오직 잡은 다음 그것을 선용해야만 만인에게 유익할 수 있다.폭력에 의한 탈취,세습제도,문민 선거 이 가운데 어떤 절차를 통해 잡은 권력도 마찬가지다.그 사후적 사용에공정과(특히)지혜가 듬뿍 들어 있는 권력이 아니고서는 사회의 공동 목적에 봉사할 수 없다.권력은 이 점에서 돈보다 까다롭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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