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逆轉의시대>1.빨라야 좋을 것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촌스럽다고 흉보던 흑백영화 주인공의 옷차림이 어느새 최신 유행이 됐다.시어머니 눈치보던 시집살이는 며느리 눈치보기로 변했다.명문대출신 연예인,연하의 남성과 결혼이 별로 화젯거리가 되지 못하는 세상.최근 가정에서,사회에서 우리의 통 념을 깨는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역전(逆轉)의 시대다.10년,20년 후 우리의 삶은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편집자註] 1 빨라야 좋을 것 없다 ② 달라지는 미덕(美德) ③ 남녀가 따로 있나 ④ 누가.상전(上典)'인가 ⑤ 직업 귀천.정말'없다 ⑥ 낡은 것이 좋다 ⑦ 고개 든 신부(新婦) ⑧ .딸딸이 아빠'가 낫다 ⑨ 초원 위의 내집에서 살고파 ⑩ .질(質)'로 먹는다 빨리 결혼해 얼른 애낳고,빨리 입학시켜 조기졸업시키고,빨리 취직해 고속승진하고….
숨막히게 달려온 우리의 자화상.그런데 어느날부터인지 느린 동작의 화면이 거울 저편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도 눈치 볼 것 없는데 맞선시장에 나갈 생각은 없어요.맘에 드는 사람 나타나면 천천히 결혼할래요.”(이상은.여.30.영어학원 강사.서울중구장충동) “초등학교 때부터 또래 애들한테 끌려다니게 할 필요있나요.1년 늦게 입학해 리더역할을할수 있으면 더 낫죠.”(강경애.38.주부.서울강남구압구정동)“캐나다로 어학연수하러 가려고 휴학했어요.졸업은 1년 늦어지겠지만 부담없는 학생신분도 즐기고 취업준비도 하는 거죠.”(윤기준.남.26.C대 경제학과4.서울동작구상도동) “승진이 늦었던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임원이었다면 지난 연말 정기 인사 때 정리대상자가 됐을 거예요.”(김명수.남.48.H그룹부장.서울강남구역삼동) 이유도 모습도 제각각이다.한가지 공통점은.이젠 천천히'.
우선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있다.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결혼적령기를 넘긴 30대 미혼남의 비율이 90년 9.5%에서 95년 13%로 3.5% 증가했다.30대 여성의 미혼율도 90년 4.1%에서 95년 4.8%로 늘었다.특히 20대 여성의 경우 90년엔 50.8%가 미혼이었으나 95년엔 미혼자가 56%나 됐다.연령에 구애받지 않는 신세대의 결혼관과 함께 전반적인 고학력화와 여성의 활발해진 사회참여등이 주된 이유다.
결혼이 늦어졌다고 아이를 빨리 낳는 것도 아니다.
“애 빨리 낳아봐야 신혼재미만 줄이는 셈이죠.2년쯤 있다 낳을 생각이에요.”지난해 결혼한 김수영(29.주부.서울노원구월계동)씨의 경우처럼 신세대가정의 상당수가 결혼후 1,2년정도는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추세.맞벌이 가정이 늘어난데다 가 각자의생활을 즐기려는 생각이 강해진 탓이다.
교육현장에선 신세대 가정과는 또다른 형태의.천천히'현상이 보인다. 지난해 처음으로 도입된 초등학교 조기입학제.모두들 과열현상을 우려했다.하지만 정작 제도가 실시되자 서울지역의 조기입학자는 1천8백85명에 불과했다.반면 초등학교 입학유예자 수는94학년도 적령아동의 2.6%(3천5백78명)에서 9 5학년도3.2%(4천3백32명),96학년도 3.3%(4천3백39명)로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서류상으로는 질병으로 인한 입학유예신청이 90%이상.그러나 실제로는 신체적으로 아무런 무리가없는 경우가 상당수다.
다 자라 대학까지 간 아이들은 이번엔 졸업을 늦춘다.좁아진 취업문을 뚫고 들어가자니 전문성이나 어학수준을 높일 필요가 절실해졌기 때문.해외연수.대학원진학등으로 늦깎이 졸업과 취업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해외어학연수의 경우 과거엔 방학기간을 이용한 단기연수가 대부분.그러나 최근엔 아예 1학기 또는 1년간 휴학하고 가는 것이일반화됐다.실제로 연세대의 경우 군입대가 아닌 일반휴학자의 수가 91년 2학기엔 4.3%(8백46명)에 불과 했으나 96년1학기엔 6.5%(1천5백12명)로 늘어났다.특히 일반휴학생 전체에서 4학년이 차지하는 비율이 91년 2학기 30.5%(2백58명)에서 96년 1학기엔 42.5%(6백43명)로 급격히증가했다..소속은 유지한채'취업준 비를 하려는 휴학이 늘어난 것이다. 또한 전문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다보니 석사나박사학위를 취득해 천천히 취직하는 경우도 늘었다.신입사원 선발을 담당하는 삼성전자 인재개발연구소 이재일(李在一)과장은“이공계의 경우 70~80%가 석사학위 소유자”라며 “그러다 보니 입사자 연령이 높아지는 추세”라고 말한다.
이러한 다양한.천천히'현상에 대해 연세대 김용학(金用學.사회학)교수는“성장위주로 달려온 우리 사회가 위험의식을 갖게 되면서 나타난 자연적인 것”이라고 분석한다.물론 김명수씨처럼 사회적 압력을 느끼며.먼저 출세하는 자는 먼저 망한다 '는 자조섞인 의식에서.천천히'를 외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하지만 김씨의 경우조차도 고속승진에 대한 조바심에서 벗어난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그런 점에서.천천히'현상은 우리 사회가.빨리병'에 대해 반성하며 여유를 찾아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정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