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나다>답십리성당의 팔방미인 이기정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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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이사람의 취미는 사진촬영과 아마추어 무선통신이다.사진은 중학교때부터,무선통신은 5년 남짓 됐으니 취미에 빠져드는 깊이가 보통은 아닐 것같다.취미라기보다 생활에 가까운 컴퓨터와의 인연도8비트 애플컴퓨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니 만만치 않다.게다가 항공료빼고 단돈 3백달러로 한달간 유럽을 배낭여행한 경험까지.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한참전인 70년대말,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이쯤되면 신세대축에 낄 덕목은 대충 갖춘 셈일까.
올해 나이 쉰둘.중학생.초등학생틈에 섞여 학원에 다니면서 컴퓨터를 배우던 시절에 이미 삼십줄의 어른이었다면 어떨까.한가지만 더 덧붙이자.이 사람은 까만 윗도리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하얀 로만칼라차림이다.그렇다면 신부(神父)?속세 와 연(緣)을달리한?만일 당신의 연상이 이렇게 이어진다면 사진촬영.아마추어무선통신.컴퓨터가 취미이자 생활인 이기정신부는 섭섭해할 것임에틀림없다.
그가 아는 한 신부는 세상 속에,세상 한가운데 있다.고백성사를 통해 세상의 가장 어두운 이야기들이 흘러드는가 하면,명동성당의 살림을 맡은 수석신부였던 지난 87년에는 한국현대사가 고스란히 그의 눈앞에서 머물렀다가 지나가기도 했다.
요즘은 주임신부를 맡고 있는 답십리성당이 세상읽기 현장이다.
그의 말마따나 현대인들은 종교에서 서로 믿고 도와줄 수 있는 공동체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신도들은 정해진 미사외에도 온갖 크고 작은 모임들을 만들고,그 공동체 모임에 신부님이 찾아와 주기를 끊임없이 청한다.“신자들이 신부를 가만 안놔둔다”면서“혼자 사는데도 좀 고독하고 싶단 생각이 저절로 든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실제로 솔직하다.
미사가 네차례나 있는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들고 출사(出寫)에 나서는 것은 그런 이유다.사진은 그가신도들과 새롭게 만나는 수단이면서,그의 휴식인 것이다.
지난해 12월19일은 그에게서 사진을 배운.예수님의 사진벗들'이 대학로 예총회관에서 열고 있는.새 생명살리기 자선전시회'이자.이기정신부 사제서품 25주년 기념전시회'의 마지막날.때맞춰 출간된 그의 수필집.총각이 주례를 본다고?'를 사든 관람객들의 사인공세가 끊이질 않는다.“신부님,저 명동성당에서 사진 배운 아무개예요.그때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네요.”“좋아지긴,이젠 늙어서 쭈글쭈글하지.”은혼식에 비겨.은경식'이라 불리는사제서품 25주년을 기리는 행사이기 도 한 이 자리에서 그는 나이드는 것이 서러운,보통사람의 소박한 속내를 꾸밈없이 드러낸다. .새 생명살리기 자선전시회'란 이름에는 전시된 사진을 판돈은 모두 미혼모들의 출산을 돕는 비용으로 쓴다는 뜻이 담겨 있다.팔리지 않으면?“자기사진을 자기가 사는 거지.”다소.바보산수'같은 방법으로라도 서로 돕고 살 이유를 찾는 이 런 소박한 삶의 한가운데 이기정신부의 삶도 있다.“새해 소망이라면 글쎄,외국사람들하고 무선통신을 본격적으로 해봐야지 하고 있는데….”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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