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은 현란한데 서사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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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대물림해 화원이 돼야 할 오빠가 재주 없음을 탓해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림 재주를 타고난 여동생은 오빠의 이름을 빌려 남자로 살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윤복(김민선)은 당대 최고의 화가 김홍도(김영호)의 제자이자 궁중의 화원으로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들 스승과 제자는 시장통에서 벌어진 소동 덕분에 거울을 만들어 파는 젊은 장사치 강무(김남길)와 알게 된다. 강무는 이내 윤복이 여자임을 짐작하고, 한창때의 두 남녀는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윤복은 강무를 길잡이 삼아 저잣거리를 누비면서 민간의 흥미로운 풍속을 화폭에 담는 일에 매료된다.

‘미인도’는 색이 넘치는 영화다. 사극 특유의 의상과 미술이 화려하고, 화가인 주인공의 붓을 빌려 풍속화의 은은한 채색을 곁들인다.

나아가 또 다른 의미의 색을 더한다. 두 젊은 남녀의 애정은 꽤 높은 수위의 노출로 묘사된다. 춘화의 동작을 나체에 가까운 두 여성이 재현하는 모습을 양반들이 구경하는 희한한 장면도 등장한다. 다시 말해 신윤복이라는 소재를 성인용으로 소화하겠다는 의도가 뚜렷한 영화다.

굳이 나눈다면, 두 가지 의미의 색이 고루 어울리는 전반부가 낫다. 죽은 오빠를 대신한 삶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를 억누르며 살아왔을 윤복은 여자 옷을 입고 강무와 사랑을 만끽한다. 때를 같이해 그의 풍속화 역시 세속의 욕망을 절묘하게 담아내며 만개한 솜씨를 보여 준다는 이야기 흐름이 흥미롭다. 특히 개울에서 목욕하고 그네 타는 여자들을 동자승이 훔쳐보는 ‘단오풍정’을 비롯해 역사 속의 신윤복이 남긴 풍속화의 장면을 입체화해 보여 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윤복의 재능에 대한 주변의 시기와 질투는 점차 커진다. 더구나 윤복이 빠져든 풍속화는 궁중화원의 본분인 유교적 교양물과 거리가 멀다. 그 결과 윤복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이 무렵부터 이야기를 매만지는 솜씨가 떨어진다. 스승 김홍도가 삼각관계에 가세하는 과정이 좀 느닷없고, 김홍도를 짝사랑하는 기녀 설화(추자현)의 음모는 줄거리 전개의 촉매로만 요긴하다. 정작 설화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그림과 사랑 사이의 줄타기는 이처럼 엇갈린 사랑의 사파전으로 대체되지만, 그 정서는 도돌이표의 느낌이 강하다. 직전에 강무와의 사랑에서 윤복이 맛본 비탄과 시련이 반복된다. 자연히 막판의 파국은 긴장감을 잃는다.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천재화가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목숨 부지를 위해 남에게 기대야 하는 여자만 남는다.

노파심에서 확인하자면, 신윤복이 여자라거나 김홍도와 사제 관계라는 것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 같은 시나리오의 내용은 소설 『바람의 화원』이 출간되기 전에 이미 저작권 등록을 마쳤다는 것이 영화사 측의 설명이다. 영화 제목의 ‘미인도’는 에필로그에 등장한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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